[엘르보이스] 내가 좋아하는 우리 동네

강서구 주민 주목! 30년 넘게 강서구에서 살아온 최지은 작가의 동네 애착기.

ⓒnote than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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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익숙한 활기 속에서
우리 가족이 서울로 이사한 건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이 되던 가을이었다. 이전까지 경기도 소도시에 살던 내게 서울은 몇 번 가보지 못한 특별한 곳이었다. 뮤지컬 영화 〈애니〉를 보러 갔던 서울극장 앞의 인파, 무슨 공연을 봤는지 몰라도 붉은 벽돌이 강렬했던 대학로 샘터파랑새극장, 학교 도서실보다 더 많은 책이 있어 천국 같던 종로서적…. 전주에 살던 사촌언니들은 들국화 콘서트를 보러 갔다가 밤늦은 시간에 우리 집에 와서 하룻밤을 자고 돌아가기도 했다. 서울엔 세상의 멋진 게 다 모여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린이 드라마와 동화책 속 서울 아이들은 모두 안경을 쓰고 체르니 30번을 칠 줄 아는 깍쟁이 공부벌레 같았고, 매일 밖에서 뛰어노느라 콧잔등이 시커멓게 탄 나는 그들 사이에 낄 수 없을 것 같아 겁이 났다.
 
웬걸. 서울 아이들은 내가 살던 동네 아이들보다 욕을 좀 더 잘한다는 것만 빼면 별다른 점은 없었다. 전학 간 학교에서도 교실에서 나무 난로를 땠고, 본관 옆에는 을씨년스러운 재래식 화장실이 있었다. 새 친구들이 생긴 나는 매일 방과 후 교문 앞에서 파는 달고나와 잉어엿, 떡볶이를 사 먹다가 1년 사이 8kg이 늘었다. 아침엔 고물상이 늘어선 골목을 따라 등교했고, 하굣길엔 언덕 위 판잣집 사이에 있는 어두컴컴한 구멍가게에 들어가 100원을 내고 아폴로나 논두렁을 샀다. 6학년이 되던 해, 같은 학년 남자애들이 ‘따닥이’라 부르던 간이 전기충격기를 써서 동전 없이 오락실에 드나들다가 경찰에 붙잡혀 신문에 난 게 우리 동네의 빅 뉴스라면 빅 뉴스였다.
 
서울도 다 같은 서울로 쳐주지 않는다는 걸 중학생이 돼서야 알았다. 내가 살던 강서구와 가깝지만 엄연히 행정구역이 다른 옆 동네, 양천구에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학군’이라는 것이 있었다. 목동에서 전근 온 몇몇 교사는 우리를 노골적으로 경멸하며 “S 중학교 애들에 비하면 너희는 쓰레기”라는 말을 수시로 내뱉었다. 담배 피우는 애들이 좀 있었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못 가는 애들이 좀 많다고 그래도 되나 싶어 모두 모욕감을 느꼈지만 반박할 용기는 없었다. 나는 목동에 있는 학원에 갈 때마다 서울로 처음 전학 올 때 같은 기분이 들었고, 언니는 우리 동네 이름이 싫다고 했다. 몇 년 뒤, 한 드라마 남자 주인공의 “나는 XX동이 싫어”라는 대사 때문에 해당 지역 주민들이 항의한  적 있었다. 나는 그 작가가 어떤 얘길 하고 싶었는지, 주민들이 왜 항의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목동도, 강남도, 대치동도 아닌 우리 동네가 전국적으로 주목받은 적이 있었다. 당시 〈일요일 일요일 밤에〉라는 예능 프로그램에서 청소년에게 술이나 담배를 팔지 않는 ‘양심 가게’를 찾아다녔는데, 바로 우리 집에서 두 정거장만 더 가면 있는 버스 정류장 앞 작은 슈퍼마켓이 선정됐다. 강서구 OO동의 명예를 드높여준 가게 아저씨 덕분에 나와 친구들은 모처럼 우리 동네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었다.
 
ⓒGiselle Herrera

ⓒGiselle Herrera

 
지금 나는 그때 살던 동네 바로 옆 동네에 산다. 중학교 때 담임이 무단결석하는 친구 집에 찾아가보라고 해서 처음 와봤던 곳이다. 우리 동네에는 오래된 방앗간과 요즘은 거의 볼 수 없는 책 대여점, 좁고 허름하지만 은근히 ‘핫플’로 알려진 막창집이 있다. 인도가 복잡한 것도 이 동네의 특징이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양념게장이나 파김치를 통에 담아 팔거나 길가에 앉아 나물을 다듬는 할머니들이 있고, 어느 마트와 비교해도 싸다는 청과상 앞엔 늘 긴 줄이 늘어서는데 목청이 큰 주인과 물건을 사려던 손님 사이에 종종 실랑이가 벌어진다. 전동 휠체어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아저씨들, “오래된 사진 복원해 드립니다”라고 적힌 광고판, 토스트에서 돼지 껍데기 볶음까지 별걸 다 파는 노점 사이에서 부딪치지 않으려고 요령 있게 몸을 비틀어 지날 때마다 느끼곤 한다. 아마도 세상 어딘가엔 이보다 더 좋은 동네가 있겠지만, 나는 우리 동네의 어수선한 활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언젠가 이곳을 떠나더라도 그럴 것이다.  
 
 
최지은
여성과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주로 쓴다. 〈괜찮지 않습니다〉와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를 펴냈고 뉴스레터 ‘없는 생활’을 발행한다. 늘 행복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재미있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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