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더퍼슬, 전설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덕질 좀 한다는 여자들이 더퍼스트슬램덩크의 투디 남자들에게 빠진 이유

우리 영광의 시대는 지금!
요즘 나와 친구들은 행복하다. ‘농놀’ 때문이다. 농놀은 ‘농구놀이’의 줄임말인데, 지금 한국에서는 만화 〈슬램덩크〉 덕질을 의미한다. 1월 초 〈더 퍼스트 슬램덩크〉(이하 〈더퍼슬〉) 개봉을 앞두고 나는 좀 안일했다. 과거에 〈슬램덩크〉를 무척 사랑했지만, 완결 후 26년이나 지난 데다 이제 모든 덕질에서 은퇴해 유유자적 살아가는 ‘머글’에 불과하니 일단 의리로 한번 볼까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극장에 일곱 번째로 앉아 있었다. 오프닝의 묵직한 베이스 사운드와 함께 주인공들이 차례로 스크린에 등장하는 순간 벅차오르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혹시 굿즈를 구할 수 있을까 싶어 팬데믹 동안 만료된 여권까지 재발급받아 급히 오사카에도 다녀왔다. 〈슬램덩크〉가 구원(혹은 망친)한 사람은 나뿐 아니다. 야근과 격무에 시달리던 친구 J는 주말은 물론 평일 밤에도 〈더퍼슬〉을 긴급 수혈하듯 보러 다니더니 “요즘 웬만한 일에는 화가 안 나”라고 온화하게 말했다.
 
두 아이를 키우느라 바쁜 친구 Y는 평일 낮과 심야 시간대를 노려 극장에 열세 번 갔다. 교통사고로 입원하던 날 집에 도착한 〈슬램덩크〉 완전판 24권을 통째로 캐리어에 넣어 병실에 들고 가는 투혼까지 발휘했다. 외국에서 일하다 잠시 한국에 들어온 친구 S가 틴더로 인한 만남을 가져본 결과 “사실 난… 2D 남자만 사랑할 수 있는 것 같아”라고 고백했을 때 J와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우리는 밤 9시에 택시를 타고 달려가 〈더퍼슬〉을 봤다. 신이 난 S가 외쳤다. “역시 2D 오빠가 최고야!”
 
〈더퍼슬〉 누적 관객 수가 400만 명을 넘어서는 동안 미디어에서는 이 현상의 주인공이 ‘3040 남성’이라는 식으로 호들갑 떨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 열기를 견인한 건 뜨거운 코트를 가르며 극장에 n번씩 가고 다양한 행사를 주도한 여성 팬들이다. 요즘 SNS와 2차 창작 커뮤니티는 〈슬램덩크〉가 완전히 뒤덮었다. 성공한 모든 콘텐츠가 그렇듯 BL 기반의 창작물이 다수인데(그렇다. 그들은 사랑을 하고 있다), 캐릭터들의 일상이나 후일담, 개그물과 각종 패러디도 넘치다 보니 내 스마트폰 평균 스크린 타임은 하루 18시간이다. 팬들은 원작과 〈더퍼슬〉은 물론 90년대 방영된 TV 애니메이션(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다), 다케히코 이노우에 인터뷰와 일러스트레이션집 등 〈슬램덩크〉와 관련한 모든 콘텐츠로부터 떡밥을 찾아내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이어 붙인다. 조연인 채소연과 권준호, 이달재 혹은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는 단역의 시점에서도 수많은 작품이 탄생할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이 사랑하는 세계와 연결되고 싶고 어떻게든 흔적을 남기고 싶은 팬들의 자연스러운 욕망 때문일 것이다.
 
“무슨 〈슬램덩크〉 중독자 재활 모임 같은 데라도 들어가서 치료해야겠다 싶을 정도였죠.” 과거 다케히코 이노우에와의 긴 대담을 진행한 시인이자 만화평론가 이토 히로미는 말한 바 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농놀’에 미쳐 있을까. 이 이야기를 하려면 잠실 주경기장에 모여 17박 18일 필리버스터를 해도 모자라다. 〈슬램덩크〉는 농구 만화지만 거기엔 ‘네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다 넣어봤다’의 교과서처럼 다채롭게 아름다운 소년들이 있고, 그들의 우정과 열정, 좌절과 성장, 모두가 꿈꾸지만 실제로는 가져본 적 없는 청춘의 노스탤지어가 있다. 게다가 그들은 나처럼 나이를 먹지도, 내가 사랑했던 수많은 남자처럼 변질되지 않는 존재다.
 
내가 다니는 대학원의 신입생 K는 나처럼 온갖 아이돌을 ‘파다가’ 그들이 또 온갖 범죄와 논란으로 ‘터져서’ 갈 곳을 잃은 채 방황 중이었다. 며칠 전 다시 만난 K는 내게 은밀하고도 진지하게 말했다. “저 〈더퍼슬〉 봤어요. 이제 여기 정착하려고요.” 주인공 강백호가 속한 북산고 농구부와 맞붙는 전국 최강 산왕공고 주장 이명헌에게 빠져 ‘산왕소녀’가 된 K가 덧붙였다. “요즘 너무 바쁜데, 너무 행복해요.” 그러니까 우리의 ‘영광의 시대’는 지금이다.
 
최지은
여성과 대중문화에 관한 글을 주로 쓴다. 〈괜찮지 않습니다〉와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 등을 펴냈고, 뉴스레터 ‘없는 생활’을 발행한다. 늘 행복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재미있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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