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내 마음속에 사는 순한 할머니

“저게 벼인가? 푸릇푸릇 예쁘네!”

 
내 마음속에 사는 순한 할머니
“저게 벼인가? 푸릇푸릇 예쁘네!”
2020년 3월 말, 처음 보는 평야를 보며내뱉었던 말. 도시인인 나에게 3월은 여지없는 봄이었고, 교과서에서나 봤던 김제평야에 첫발을  디뎠으니, 눈에 보이는 게 당연히 벼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예뻐서, 평생을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나는 전북 김제평야 한복판의 4500만 원짜리 폐가를 샀다. 2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안다. 3월에 벼는 무슨. 모내기는 느지막이 5~ 6월에 시작되며, 겨울을 이겨낸 보리 싹들이 푸릇푸릇 그렇게 예쁘다는 것을 알았다. 물론 꼬박 2년을 시골에서 살고  난 뒤 알게 된 것이 보리와 벼 판별법만은 아니다.
 
시골의 시간은 느리고도 빠르다. 넋 놓고 자질구레한 일을 하다 보면 하루가 훌쩍 지난다. 매일같이 달라지는 들판의 색은 또 얼마나 변화무쌍한지 고작 사계절로 이 다채로움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인류의 무지함이 안쓰러운  한편, 딱딱 들어맞는 24절기를 온몸으로 느낄 때마다 우리 조상들의 지혜에 감탄하게 된다. 매년 부지런히 같은 풍경이 펼쳐진다.  이틀 전인 12월 7일은 대설(大雪)이니 고작  1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시골 마을에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집집마다 김장하느라 정신없었을 것이다. 매일 건물을 부수고,  새 건물을 지어내며 유속 빠른 계곡을 지나듯 얼굴 모르는 사람들을 지나치는 도시와 달리  2년 사이 이 마을에 달라진 것이라고는 폐가였던 우리 집의 지붕 색이 달라진 것 정도겠지만, 이제는 안다. 이 변함없이 정겨운 풍경 뒤에  꽤 정성스러운 매일이 있다는 사실을. 그걸 몸소 겪고 나서 도시에 돌아오니 너도나도 바쁜 사람들 사이에서 꽤 부지런한 사람이 되어  하루를 뿌듯하게 보내곤 한다. ‘인생이, 사는 게 과연 무슨 의미일까’라는 고약한 질문이 종종 떠오르는 30대를 그래도 잘 살아낼 수 있는 하나의 뿌리가 생긴 셈이다. 인생이야 별거 없겠지만, 그 안의 하루하루를 잘 살아내는  것은 나에게 꽤 의미 있는 일이다. 그래야  나의 성실함으로 오늘과는 다른 내일이 올 테니까. 지독히도 춥다가도 어느새 봄이 오는 것처럼.
 
다시 도시다. 어쩌다 시작된 시골살이의 끝은 어떨까 궁금하던 차에 이게 웬걸, 정말 어쩌다 끝나버렸다. 모든 것이 우연히 시작돼 이렇게 무계획으로 살아도 되는 걸까? 어, 어 하며  30만 유튜버까지 와버렸는데, 이제 욕심 좀 내볼까 하니 마음과는 다르게 우연의 방향이 결말로 향했고, 시간 여행을 한 것처럼 나는  어느새 도시 한가운데 서 있다. 그래도 시골살이 내내 다시 도시로 돌아간다 해도 잊지 말자고, 마음속에 새긴 것이 하나 있다. 나도 원치 않게 어른이 되어버린 나를 나마저,  돈 버는 것 외에는 쓸모가 없는 사람으로 대하지 말 것. 직업 말고도 나를 쓸모 있는 사람으로 대해줄 것. 여전히 어린아이처럼 소꿉장난도 좋아하고(물론 인테리어 등 어릴 때보다 소꿉장난에 꽤 돈이 들어가지만), 친구들과 쓸데없는 대화도 좋아하며, 누군가와 친밀한 스킨십을 나눌 줄도 아는, 가끔 요리에 실패해도 새로운 요리에 도전하는 취미가 있는 그런 어른이다. 돈을 벌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돈을 벌어 나를 잘 먹여 살리기 위해 산다. 물론 언젠가 돈을 벌지 못해도 나는 나를 먹여 살릴 수 있다. 나에게는 300평의 큰 텃밭이 딸린 나만의 작은 집이 있으니까. 그곳에서 돈은 되지 않더라도 나를 기분 좋게 하는 매일을 찾아냈으니까. 그러니 다시 도시로 돌아가더라도 길 잃은 어린아이처럼 헤매지 말자고, 너는 좋은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고 스스로 다독이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그 다짐이 오늘의 나를 위로한다. 그래서 나는 도시에서 5일 동안 내가 선택한 삶에 최선을 다하고, 주말이면 내 안식처로 달려간다. 사서 하는 고생,  오도이촌이 시작된 것이다. 시골살이를 통해 알게 된 것들을 써 내려가고 보니 결국 할머니 같은 말로 가득하다. 그렇다. 마음 붙일 곳이 점점 줄어 차가워져 가던 회색 어른, 내 마음속에 어느새 마음씨 좋은 할머니 한 명이 들어와 살고 있다. 그리고 그 할머니에게 허락된 건강한 매일은 제법 행복하고 감사하다.
 
최별
MBC 프로듀서. 서른둘이 되던 해 김제의 115년 된 폐가를 덜컥 산 뒤 유튜브 ‘오느른’을 통해 시골살이 브이로그를 올렸다. 2년간의 시골살이를 마치고 현재는 도시의 삶을 오가며 소중하게 느낀 것들을  글로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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