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접힌 종이를 향한 사랑

내가 만드는 어떤 것을 좋아해주는 반짝이는 눈동자를 직접 마주하게 된다는 것!

 
접힌 종이를 향한 사랑
사람들은 책을 좋아한다. “저 책 안 읽는데요?” 하는 사람도 사실은 책이라는 물건을 좋아한다. ‘뭐래? 난 아니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이야기하다 보면 “그러고 보니 어릴 때 읽은 책인데…” 한다. “책은 쓰레기야”라고 말하는 사람은 일생 모은 책이 집에 너무 쌓여 이사할 때마다 이삿짐센터의 구박을 듣는 장서가일 확률이 높다. 그들은 단지 오랜 시간 함께 살아온 동거인에게 불평거리를 지닌 독설가일 뿐이라 이들에게 “맞아! 책은 쓰레기지! 요즘 누가 책 읽냐?”고 진심 어린 맞장구를 친다면 눈치 없이 가족 욕을 한 사람과 같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전 인류의 잠재적 사랑에도 불구하고 책은 유망하지 않다. 점점 많은 사람이 책을 사랑하는 줄도 모르고 살아간다. 속상한 일이다. 어쨌든 사랑이 있는 곳에는 길이 생긴다. 서울 아트북 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이하 UE)은 그렇게 생긴 놀라운 길 중 하나다. UE는 팬데믹 시기에 온라인으로 잠시 전환되기도 했지만, 2009년부터 매년 꾸준히 열린 독립출판 창작자들의 축제로 올해 다시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성황리에 제14회를 맞았다.
 
이 행사에서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보다 더 다양한 출판물을 창작자가 직접 가지고 나와 판매한다. 올해는 3일간 189팀의 창작자가 2만3449명의 관람객을 만났다. 약하고 강하고 반갑고 뜻밖인 책이 늘어선 부스 사이를 누비며 눈을 빛내는 손님들 또한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창작자이자 판매자인 부스 지킴이들은 관람객이 책에 어떤 애정을 품고 이곳에 왔을지를 탐색하며 부지런히 말을 건넨다.
 
나도 페미니즘 출판사 봄알람을 시작한 2016년부터 매해 이곳에 우리 책을 차렸다. 서서히 출간작이 늘어나 올해는 22종,  판매용 재고를 어림잡아 준비하니 수백 권이었다. 사무실이 있는 주상복합건물 로비 구석에서 대형 박스 아홉 개 분량의 책을 재분류하는 해체 쇼를 감행하는 등 소소한 고충도 있었지만, 만만치 않은 질량을 뽐내는 책들을 이고 지고 행사장에 향하는 걸음에는 명백한 동력이 있었다. 지나치게 순정으로 들릴까 봐 쑥스럽지만, 바로 독자다. 나는 독자들의 응답을 받기 위해 UE에 간다.
 
독자의 응답이란 무엇인가? 책이라는 모양으로 발신한 나의 신호가 사람들과 만나 발생하는 모든 반응이다. 우리 책들과 완전히 초면인 잠재 독자가 매대 위의 책에 드러내는 호감, 이미 무언가를 읽은 독자가 전하는 짧은 감상, 어떤 한 권이 예비 독자에게 선택되는 순간 등 모든 것이 즐거운 응답이다. 무언가를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 사람들이라면 이런 경험을 귀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내가 이러이러한 생각과 기대로 만든 것을 누가 어떠어떠한 생각과 기대로 받아들이느냐에 주의를 기울이는 경험이 없다면 어느 순간 내가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모르게 될 것이다.
 
물론 모든 반응에 귀 기울이면서는 무언가를 계속 만들어내기 어렵다.. 세상에는 선의와 존중만큼이나 길 잃은 반감과 악의적 곡해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UE는 상당히 신뢰할 수 있는 공간이다. 독립출판이라는 유망하지 않은 시장에서 고집스럽게 함께하는 주최자, 창작자, 방문자들이 만들어내는 무형의 질서 덕분이다. 완고한 소비자의 태세가 아닌 즐거운 조력자의 심정으로 지갑을 여는 사람들은 그저 물건을 산다기보다 구매로써 창작자에게 공감을 전하고 그의 세계 일부를 잠시 공유하러 이곳에 온다.
 
행사 3일간 부스 판매를 하면서 말을 섞은 사람의 수가 1년간 일상에서 대면하는 사람 수보다 더 많은 것 같다. 상상만으로 적잖은 피로가 예상되지만, 현장에서는 그런 피로가 놀랍도록 기꺼워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우리 매대의  책 한 권을 집어 든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고, 반복해서 같은 말을 하며 입 속이 말라도 어떤 말을 던지면 낯선 이의 흥미에 잠시 닿을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된다.  방문객이 천천히 구경할 수 있도록 매대 뒤로 존재감을 지우다가도, 낯선 그에게 이 책이 수수께끼일 것을 생각하면 중개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다.  개입은 적중하기도, 역효과를 낳기도 하지만, 어느 쪽이든 즉석에서 책을 고르는 독자의 즐거움을 목격하는 건 대단히 든든한 일이다.
 
그리하여 나는 나날이 미약해지던 믿음에 다시 힘을 얻는다. 사람들은 책을 좋아한다. 사실 독립출판물을 구경하러 서울의 북쪽 끝에 자리한 미술관에 오는 이 많은 사람이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매해 의문이지만, 평소 책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잊고 살던 수많은 사람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시인 스테판 말라르메의 말을 빌리면 책이 특별한 건 “많이 접혀 있기” 때문이다. UE에 대해 지금껏 몰랐지만 이 문장이 앞뒤 없이 마음에 든다면 분명 내년에도 열릴 UE에 오시기를 추천한다. 갖가지 방식으로 접혀 있어 한눈에는 그 전모를 알 수 없는 책들을 뒤적이며, 세상에 쓸려 잊혀가는 우리의 사랑을 증명하자.
 
이두루 출판사 ‘봄알람’ 대표. 베스트셀러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와 〈김지은입니다〉 등을 펴냈다. 현실 이슈를 다룬 텍스트와 논의가 여성의 삶에 즉각적으로 개입하는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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