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소중한 사람에게 난 몇 점짜리일까? 성적표를 매겨볼까요

성적표라는 기준 없이, 내 기준으로 좋은 사람 되기!

임현주의 성적표
추석 연휴에 혼자 영화를 봤다. 선택은 〈성적표의 김민영〉. 영화 제목에 떡하니 김민영이 적혀 있으니 당연히 김민영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 포커스는 민영의 친구, 정희에게 맞춰져 있었다. 민영(윤아정)과 정희(김주아)는 청주에서 함께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단짝친구. 수능을 본 후 민영은 대구로 대학을 가고 정희는 대학 진학 대신 테니스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 그리고 어느 날 둘은 서울에서 만나 하루를 보내게 된다. 그렇게 친했지만 왠지 두 사람의 하루는 어색하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챙기기는커녕 무심하게 대학 성적표에만 몰두해 있는 민영, 그런 민영을 보며 서운한 정희. 둘을 보면서 내 학창시절이 오버랩됐다. 10대 시절의 친구들이 어떻게 서서히 멀어졌는지, 아마 나는 민영에 가까웠을 것이다. 현실에서도 머릿속에서도 꿈과 계획이 많아 분주한 친구였으니까. 정희는 그보다 10대 시절의 우정과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어찌 보면 현실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민영은 대학에 가지 않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구체적인 계획이 없어 보이는 정희를 걱정했다. 하지만 정희는 민영의 생각만큼 대책없거나 꿈이 없지 않았다. 정희에게는 정희만의 루틴과 계획, 책임감이 있었다. 다만 ‘평균’이라 말하는 기대치와 모습에서 벗어나 있을 뿐.
 
정희는 떠나면서 〈김민영의 성적표〉를 남겨놓는다. 민영의 경제력, 인간관계, 패션 센스 등에 대해 점수를 매긴 후 적은 마지막 항목은 ‘한국인의 삶’이었다. 정희가 본 민영은 한국인의 삶에서 ‘F’ 였다. 이전에 둘의 대화에서 한국인의 삶이 싫다는 이야기가 몇 차례 등장했다. 한국인의 삶을 싫어하고 그런 한국인을 싫어하는 민영이지만 정희가 보기에 민영은 결국 비슷한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정희의 말을 빌려, 한국인의 삶이란 이런 것이다. 무엇을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성과를 향해 늘 바쁘고, 지금 즐거울 수 있는 일을 즐기지 못하고, 불안해하고, 한 켠에 비교와 상승에 대한 생각을 놓지 못하고. 아, 순간 관객석에서 동일한 전율이 느껴졌다. 나 또한 절대 민영 같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 순간 민영에게서 내 모습이 겹쳐 보였다. 그러고 보니 민영의 냉장고엔 제대로 된 음식 하나 없었고, 화장대 상자는 도착한 지 1주일이 넘었지만 뜯지도 않은 채 방치돼 있었다. 내 방에도 뜯지 않은 택배 상자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쌓여 있었다. 분주함과 불안함에 현실을 돌보지 않고 방치한 것이다.
 
또 다른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엊그제 엄마와 한판 싸운 순간. 연휴인지라 늦잠을 자고 일어나 화장실에 들렀다가 비몽사몽 다시 방에 들어가는 내게 엄마가 건넨 한 마디가 발단이었다. “전을 부치는데 와서 보고 가지도 않니?” 순간 입이 삐죽 나왔다. ‘언제 전을 먹고 싶댔나, 그냥 편하게 사오지’ 이렇게 적고 보니 내가 잘못했다. 엄마가 바란 건 작은 관심이었다. 와서 전 하나 집어먹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더라도 한 마디라도 건넸다면 서운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그런 기대를 부담스럽게 느꼈고. 내 입장에서도 물론 이유가 있었다. 평소에 충분히 열심히 살고 있으니 이때만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었다. 내일 같이 가려던 식당도 예약해 두었다. 그래서 당당하게 엄마에게 응수했다. 나에게 바라는 게 너무 많은 것 아니냐고. 아, 그 말을 다시 주워담고 싶다. 엄마와 다투고 난 후 그날 특히나 울적했던 이유를 이 순간 명확히 알게 됐다. 내가 싫어하는 일을 저지른 것이다. 나름의 할 일들을 했으니 엄마에게도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개인적으로 잘 살아가는 것과 소중한 사람과의 관계를 혼동해선 안 된다. 나에게 집중하느라 정작 옆에 있는 사람을 외롭게 만드는 줄도 모르는, 그날 임현주의 성적표는 F였다.
 
내가 느낀 복잡다단한 감정은 소위 ‘착한 딸 콤플렉스’와는 다르다. 딸이라서 엄마에게 무조건 잘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몰두하느라 상대의 마음과 시간을 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반성이었다. 굳이 장을 봐서 전을 해먹는 마음은 민영을 위한 놀이들을 바리바리 싸 온 정희의 마음과 같았고, 언제 일어나서 전을 먹을 건지 기다리는 마음은 민영이 언제 노트북에서 얼굴을 떼고 나와 시간을 보낼까 기다리는 정희의 입장이었다. 영화가 나를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지금 앞에 있는 것을 놓쳐버리는 한국인의 삶을. 영화관을 나오며 어느새 다시 비틀어진 삶의 방향을 조정하자고 다짐했다. 정희의 삶을 떠올려보면서. 누군가의 눈에는 목적 없어 보이지만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의 속도대로 살아가는 삶, 상상력이 있는 삶, 소중한 사람을 실망시키더라도 조용히 성적표를 그리며 다시 한 번 손을 내밀 줄 아는 마음의 여유가 있는 삶, 그런 삶을.
 
임현주 듣고, 쓰고, 읽고, 말하는 MBC 아나운서. 좋아하는 것을 하며, 신중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부지런한 나날을 담은 책 〈아낌없이 살아보는 중입니다〉 〈우리는 매일을 헤매고, 해내고〉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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