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소설 혹은 영화로! '멸종'하기 전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들

대법원이 기지촌 미군 위안부가 국가폭력임을 인정했다. 우리가 잊어버린 역사에 대해

 
소요산에 다녀왔습니다
8월의 날씨 좋은 마지막 주말 ‘소요산’에 다녀왔다. 자유롭게 슬슬 거닌다는 ‘소요(逍遙)’의 뜻에 걸맞게 가을 산행을 다녀온 것은 아니다. 〈소요산 Tearless〉은 UCLA에서 종신 교수로 영화를 가르치는 김진아 감독의 미군위안부 VR 영화 3부작 중 두 번째 작품이다. 1992년 윤금이 살인사건을 담은 〈동두천 Bloodless〉에 이어 지난해 제네바국제영화제 가상현실 부문에서 최우수작품상을 받았다. 〈소요산〉은 1970년대 성병에 걸린 것으로 추정되는 미군 기지촌 여성을 감금, 치료할 목적으로 운영됐던 낙검자 수용소 ‘몽키하우스’의 비극을 다뤘다. 그리고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는 상암생태공원에서 ‘망각을 기억하기’라는 이름 하에 상영회와 김진아 감독 토크를 개최했다. 우리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덜 다뤄진 미군위안부의 실체를 새로운 매체(VR)를 통해 기억하려는 감독의 각오가 느껴져 꼭 보고 싶었다. 그렇지만 두 작품을 보고 나서 의문이 생겼다. 이 비극은 단지 과거의 사건일 뿐일까? 기억하는 것만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최근 심취해서 읽고 있는 책 〈미친 아담 MaddAddam〉의 영향도 있었다. 〈미친 아담〉은 마거릿 애트우드(Margaret Atwood)가 10년에 걸쳐 집필한 3부작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근미래 인류는 미치광이 천재과학자 크레이크가 퍼트린 전염병으로 멸종한다. 크레이크가 개발해 놓은 신인류들이 유일한 구인류 생존자 지미, 두 여성과 함께 고군분투하며 새 문명을 개척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캐나다 출신인 마거릿 애트우드는 여성을 출산 도구로만 쓰는 미래 독재사회를 생생하게 그린 〈시녀 이야기 The Handmaid’s Tale〉로 전 세계에 빨간 망토를 입은 시위 물결을 일으킨 작가로 2019년 부커상을 수상했다. 그의 모든 소설은 끊임없이 생태와 여성 문제를 같은 선상에서 비유하고 논하면서 설득력을 배가한다. 성이든 동물이나 식물의 생명이든 생계를 위해 일하는 누군가를 착취한다는 것은 한 종의 멸종이며, 멸종은 지구의 다양성 상실이다. 그 결과 일어나는 전체주의의 공포는 곧 인류 전체의 멸종을 이끌어낸다는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미친 아담〉 1권은 소설 〈오릭스와 크레이크〉이다. 오릭스는 소아 포르노 사이트에서 착취당하는 여자아이이다. 구인류는 일상의 쾌락을 위해 라이브 처형, 동물멸종놀이를 하는 것은 물론 아동 스너프 필름을 즐긴다. 크레이크의 친구이지만 그의 천재성에 가려져 ‘찌그러져 있던’ 지미는 오릭스를 어느덧 사랑하게 되고, 신인류를 창조하기는 했으나 오릭스를 버린 크레이크에 낙담해 크레이크를 죽이면서 인류 최후의 생존자가 된다. 2권 〈홍수의 해〉에서는 어려서 부모에게 버려져 생계를 위해 성인 클럽 댄서가 된 주인공 렌이 감염을 의심받고 격리구역에 갇혀 지낸 덕분에 최후의 생존자가 되는 내용이다. 미국 SF작가 파울로 바치갈루피(Paolo Bacigalupi)도 스트립 바에서 일하며 매일 능욕당하는 신인류 와인드업 걸 에미코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설 〈와인드업 걸 The Windup Girl〉을 쓴 바 있다. 인류의 멸종 위기를 여성 착취와 연관시키는 이야기들을 보면서 〈동두천〉과 〈소요산〉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자신의 작품은 SF 장르이지만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얘기는 절대로 쓰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그가 경계하는 건 현실 착취에 대한 망각이다. 망각은 멸종이다. 그래서 단순히 기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착취를 넘어선 다양성에 대한 상상이다. “2050년이 되면 인류는 100억 명이 되고, 식량의 95%는 바닥나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꿈을 꾸고,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를 거니까”. 그가 한 강연에서 전한 말이다. 애트우드는 천재 크레이크를 숫자형 인간(Numbers Person), 친구 지미를 글자형 인간(Words Person)으로 정의했다. 다양성을 노래하는 글자가 가지는 상상력과 과학기술 사이의 균형이 깨질 때 우리는 멸종할 것이다. 단순한 기억은 모자랄지 모른다. 김진아 감독처럼, 애트우드처럼, 부지런히 글 쓰고 작품 만들다 보면 또 아는가. 거기서 구원의 길이 열릴지도.
 
이원진 〈니체〉를 번역하고, 〈블랙 미러로 철학하기〉를 썼다. 현재 연세대학교 연구 교수로 재직 중이다. 철학이 세상을 해독하는 가장 좋은 코드라고 믿는 워킹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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