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평소처럼 거울 앞에 섰던 어느 날, 눈·코 입부터 팔다리까지 뭐 하나 제자리에 있는 게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거울 속 모습이 낯설 정도로 비대칭이 돼버린 몸. 삐뚤빼뚤 엉망이 된 몸은 내가 작가로서 열심히 일한다는 증거였다. 동시에 계속 이런 식이면 작가 일부터 못 하게 되리라는 암시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언제부턴가 집에서 편히 쉴 때도 온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일을 마치고 난 후 취하는 휴식과 수면의 질이 현저히 떨어지고 있었다. 서 있거나 앉기가 여의치 않으니 외출도 거추장스러웠고, 자연스럽게 남는 시간을 스마트폰으로 때우게 됐다. 나는 항상 스마트폰을 쥐고 허송세월하는 내가 한심했다. 중독이라며 자책했지만, 미미한 체력으론 어차피 다른 취미를 가질 수도 없었다.
자세가 틀어지자 내 세상은 급격히 좁아졌다. 행동 반경이 쉽게 제한되는 현실이 나를 비통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비통함 속에서 이토록 빠르게 침울해지는 것 또한 체력 문제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한달음에 동네 요가원으로 달려갔다. 체감상 내 척추는 지구의 자전축만큼이나 틀어져 있었으므로 아무리 생각해도 홀로 바로잡을 방도가 없었다. 눈을 감고 정갈하게 명상에 임하는 이미지가 강해서일까? 혹은 수업을 ‘수련’이라 칭하기 때문일까? 나는 요가가 내가 아는 운동 중 가장 정적일 것으로 생각했다. 대망의 첫 수련 시작 후 10분 정도 지났을 때만 해도 ‘뭐야, 꽤 할 만하잖아?’라고 여유를 부렸다. 하지만 다시 10분이 흐른 후엔 애플 워치에서 긴급 알림이 빗발쳤다. 분당 심박수가 치솟고 있으니 심호흡을 하든 뭘 하든 조치를 취하라는 것이었다.
“절대 숨 참지 마세요. 자,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고.” 숨을 쉬라는 건 요가 선생님도 반복해서 강조하는 말씀이었다. 하지만 육지 포유류가 심심해서 숨을 참을 리는 없다. 누군가 숨을 못 쉬고 있다면 해석의 여지는 하나다. 지금 그가 죽기 직전으로 힘들다는 것.
다행스럽게도 내 옆 사람 또한 나만큼이나 힘든 모양이었다. 나만 미칠 것 같은 게 아니라는 사실이 급박한 와중에도 묘한 안심을 주었다. 우리의 숨소리는 선생님이 “숨 쉬세요!”라고 언질을 줄 때만 화들짝 커졌다. 나는 “훅! 훅! 훅!”거리고 그는 “학! 학! 학!”거리는 식이었는데, 서로 박자가 엇나가는 순간엔 변태 콤비의 부적절한 비트 박스처럼 들렸다. 그날 수련은 가까스로 동작을 흉내 내고, 숨 쉬면서 웃음까지 참느라 세 배로 힘들었다. 수련이 끝난 후, 나는 바닥에 쓰러져 잠시 암전을 맛보았다. 버려진 대걸레처럼 널브러져 있자니 어느새 선생님과 나뿐이었다. 나는 초면의 스승께 내 자세가 어떠냐고 여쭤보았다. 선생님은 내가 앉아 있는 모습을 가만히 보시더니 혹시 성격이 급하냐고 물었다. 허억! 나는 하마터면 주먹을 먹을 뻔했다. 수련 시간 내내 어기적거렸는데 성격 급한 걸 어찌 알았지 싶었다. 선생님은 내가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사람처럼 안절부절이라고 했다. 생각해 볼수록 참말이었다. 나는 거북목이라기보다 상체 전체가 앞으로 쏠린 타입이었는데, 별로 급하지 않을 때도 후다닥 튀어나가는 식으로 움직였다. 의외의 계기로 요가원에 신뢰를 느낀 후부터 보다 진지한 마음으로 수련에 임할 수 있었다.
한가할 땐 일주일 내내 요가원을 찾기도 했다. 아닌 게 아니라 회차를 거듭할수록 몸이 몰라보게 가벼워지고 있었다. 체중이 줄지 않았음에도 ‘내가 바람에 날아가면 어떡하지?’ 같은 헛된 고민이 들 정도였다. 나는 여전히 버벅거렸지만, 수련 후엔 나를 복구하기 위해 이토록 열심이라는 사실에 뿌듯했다.
몇 달간 겪어본 요가는 남과 실력을 견주는 스포츠가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정화 활동에 가깝다. 스승님이 숨 쉬라는 것 다음으로 많이 하는 말씀도(어쩐지 극존칭을 쓰고 싶다) 안 되는 동작은 억지로 시도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나는 어딜 가든 누가 나만큼 못하나 두리번거리는 습관이 있는데, 요가 정신을 배우고 나서는 그런 행동도 자연스럽게 고쳐졌다. 그러던 어느 날은 마치 한 달 전의 나 같은 수련생을 보았다. 그분에겐 오늘이 첫 수업인 모양이었다. 그는 예전의 나처럼 쉴 새 없이 두리번거렸고, 초심자용 수련 동작들을 거의 따라 하지 못했다.
그날 수업의 클라이맥스는 ‘전갈 자세’였다. 얻드려 뻗쳐 상태에서 한 발을 들어 전갈 꼬리처럼 반대 쪽으로 넘기는 동작인데, 조금 익숙해진 내게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를 악물고 버티는 와중에 나보다 더 위태롭던 그분이 결국 옆으로 확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그때 왜인지 눈물이 찔끔 솟았는데, 그분 얼굴에 새빨갛게 떠오른 수치심이나 열패감이 내가 오래도록 지니고 사는 것과 별다르지 않아서였다. 남들 다 하는 걸 나만 못 할 때의 기분이라면 나도 무척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즉시 부들대길 멈추고 그분보다 더 요란하게 자빠졌다. 스무 명 남짓한 수련생 중 전갈 자세에 실패한 건 우리 둘뿐이었다. 그분이 반사적으로 이쪽을 돌아보았고, 나는 헤헤헤 웃었다. 원래라면 다시 도전했겠지만, 그날은 잠시 매트 위를 뒹굴거리며 딴짓을 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 ‘당신만 못 하는 게 아니니 내일도 다시 만나요.’ 이건 첫 수업 때 자세 평가를 듣고 충격받은 내게 선생님이 해주신 격려이기도 했다.
처음엔 오로지 비뚤어진 몸을 고치러 간 요가원이었다. 요즘은 몸보다 마음가짐이 달라진 걸 느낀다. 남보다 뒤처질까 봐 불안한 고갯짓을 멈추지 못하던 내가 남의 마음까지 살필 여유를 가지게 된 것이다. 수련에 익숙해진 것도 있겠지만, 요가 시간에 들여다보는 내 마음이 부디 깨끗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정지음
싫은 것들을 사랑하려고 글을 쓰는 1992년생. 25세에 ADHD 진단을 받은 이후 첫 번째 에세이 〈젊은 ADHD의 슬픔으로 제8회 브런치 북 대상을 수상했고,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