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끙끙대며 마감하고, 편집자의 피드백이 돌아오면 글을 고쳐서 다시 보내기도 한다. 강연 요청을 거절하면서 왜 그 일을 할 수 없는지 사유를 쓴다. 혹은 수락하면서 조건을 조정해 달라는 요청도 한다. 프리랜서이자 작가인 내 업무의 많은 부분은 키보드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여 이뤄진다. 생각을 좀 더 정교하게 꺼내놓으려고, 더 정확한 문장에 가 닿으려고 노력하지만 생각만큼 잘되지 않아 번번이 좌절하기도 한다. 내가 속한 말과 글의 세계가 가진 속성이 그렇기도 하거니와 돈을 받으면서 하는 일이니까 허투루 할 수 없다. 그러는 동안 손가락은 천천히 움직이다가 멈춰서 가만히 기다리는 시간이 길다. 내 글을 읽고 생각이 넓어졌다며 즐거워하는 독자를 만나기도 하지만, 별 한 개짜리 악평과 마주하는 경험도 생긴다. 본업의 세계에서는 이래저래 스트레스를 피해 살기가 어렵다.
그런데 글 쓰는 게 즐거울 때도 있다. 어디부터 손대야 할지 엉킨 타래처럼 복잡하던 생각의 얼개를 짜고 조금씩 실마리를 풀어나가다 보면 다 잊고 지금의 글만 보게 되는 순간이 찾아오는데, 바로 그때다. 그리 길지 않지만 글 한 편을 완성하다 보면 빠르거나 늦거나, 그런 경험이 반드시 온다. 누군가의 청탁, 원고료, 마감 일정 같은 앞뒤 복잡한 사정들이 잊히고 문장 자체에 조명을 비춘 듯 고도로 집중해 파고드는 상태가 된다. 글쓰기가 능동적인 활동이 되는 그런 순간에는 일하는 고단함보다 몰입의 기쁨이 크다.
훨씬 쉽게 그리고 자주, 확실한 몰입의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리코더를 연주하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누구나 배우는 이 악기를 몇 년 전부터 다시 갖고 논다.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느냐는 동거인 김하나 작가의 질문에 어릴 적 리코더 외에는 없다고 했더니 덜컥 선물해 줬기 때문이다. 3만 원 안팎인 이 플라스틱 악기는 특히 코비드-19 시기에 사회적 거리 두기가 엄격해져서 집에 머물러야 할 때 내게 숨구멍이 돼주었다. 처음에는 단순한 멜로디라 쉽게 기억하는 동요나 크리스마스캐럴, 만화 주제곡 같은 것들을 연주하다가 인터넷으로 악보를 찾아 익히기 시작했다. 동거인이 연주하는 우쿨렐레와 나의 리코더는 귀여운 음색이 서로 잘 어울려 ‘서울 사이버 음악대’라는 이름을 짓고 둘이 할 수 있는 듀오 레퍼터리도 연습했다. 둘뿐인데 리듬 파트와 멜로디 파트가 합쳐지니 합주가 꽤 그럴듯해졌다. 영화 OST며 팝음악을 거쳐 마침내 레드 벨벳의 ‘피카부’를 커버할 수 있게 됐을 때 스스로 성취감에 뿌듯함을 느꼈다.
음계와 선율의 세계는 언어의 세계보다 훨씬 편안하다. 음악이야말로 가장 보편적인 언어라지만 일단 내가 구사하는 전문 분야는 확실히 아니다. 그곳에서 나는 당연히 서투르고, 서투른 자신에게 얼마든지 관대하다. 정교함을 요구하는 피아노나 바이올린이 아니라 어떻게 연주해도 수행평가를 착실하게 준비한 초등학생처럼 들리는 리코더 덕분에 허들이 더 낮다고 할까. 리코더를 연주하는 몰입의 순간만큼은 내가 얼마나 엉성한지 잊어도 좋다. 그렇게 키보드가 아닌 리코더 위에서 손가락을 움직일 때 내가 사라지고 소리가 남는 기분 좋음을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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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에도 어떤 사람은 나무를 다듬어 가구를 만들고, 누군가는 연필로 종이 위에 스케치하면서 말과 글 혹은 숫자로부터 피신하고 있을 것이다. 사전에서 취미의 정의를 찾아보면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하여 하는 일’이라고 돼 있다. 취미생활마저 치열한 ‘갓생’을 살겠다는 자세가 아니라 서툴러도 즐거울 수 있다는 마음, 쓸모없어도 내가 몰두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 그만이라는 태도가 때로는 효율과 성과의 차가운 세계로부터 우리 정신의 체온을 지켜준다.
황선우 에세이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말할 용기〉를 쓰고, 인터뷰집 〈멋있으면 다 언니〉를 펴냈다. 오랜 시간 잡지 에디터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의 일과 몸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는 운동 애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