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주식이 망했다. 그리고 여행하지 않기로 했다

작가 정지음이 엔데믹 시대의 여행을 대하는 태도는 놀랍도록 독창적이다

 
개미는 여행하지 않는다
내게 여행이란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귀찮은 에피소드에 불과했다. 여행이 성사되는 과정도 단순했다. 누군가 떠나자고 하면 내가 얼렁뚱땅 승낙하고, 실제로 휙 다녀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팬데믹은 순식간에 바깥에 존재할 자유를 압류해 갔다. 편의점에 가거나 업무 미팅을 잡는 것조차 감염 가능성에 삶을 베팅하는 행위처럼 느껴졌다.
 
그 와중에 여행이란 사치를 넘어 판타지의 영역이었다. 하지만 금기에는 이상한 마력이 깃들게 마련이다. 무엇이든 완전히 금지되는 순간부터는 속절없이 아름다워진다. 나는 곧 여행에 절실해졌고, 지구 반대편으로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아야 했다. 애석하게도 무언가를 참으며 깨닫게 되는 것은 그것을 얼마나 원하느냐 하는 것뿐이다. 이 순간에 여행을 참는 것 자체가 여행을 원하는 욕망이 임계치에 달했다는 반증이었다.
 
나는 짧게나마 방문했던 외국을 자주 상기했다. 가려다 만 여행지를 떠올리기도 했다. 그러자 뜬금없이 갈 엄두도 내보지 못한 지역까지 그리워졌다. 콜럼버스가 1400년대에도 다녀온 미국을 2000년대의 내가 갈 수 없다는 사실은 어쩐지 괴상했다. 집에서 미쳐가던 나는 차라리 호화 여행을 계획하며 여행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기로 했다.
 
팬데믹 이전에 심신이 자유롭던 시절, 여행을 즐기지 않았던 까닭에는 비용 문제도 있었다. 특히 해외 여행은 생각보다 많은 돈이 들었다. 원화에도 금전 감각이 없는 나는 엔화나 달러를 쓸 때면 거의 무아지경이 되곤 했다. 아낀다고 아껴도 귀국 후에는 항상 양손이 무거운 빈털터리가 됐다. 거의 모든 유흥이 제한된 지금도 거지 왕초 신세이긴 하지만…. 어쨌든 엔데믹에 발맞춰 자유롭게 떠나기 위해서는 여행을 위한 잉여 자금이 필요하다.
 
결론이 왜 그리로 튀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대뜸 주식 계좌를 만들었다. 거시 경제는커녕 미시 경제, 그러니까 자신의 재무 상황도 모르는 바보 천치가 말이다. 오로지 바보 천치만이 이런 천인공노할 일을 벌인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차라리 애매하게 무지했다면 스스로를 구했을 것이다. 그러나 내 머릿속은 펄프 회사가 자신 있게 내놓은 신제품 티슈처럼 새하얗기만 했다. 그때는 머릿속 티슈로 곧 내 피눈물을 닦게 될 줄은 몰랐다.
 
ⓒGetty 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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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스럽게 구경해 본 주식시장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커뮤니티 댓글 창에는 낙차에 얻어터진 주주들이 곡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승리자였다. 아무것도 안 샀기 때문이다. 고심을 거듭한 끝에 나름 가치 투자를 한 곳은 어떤 노래방 회사였다. 지금 내가 가장 가고 싶은 곳이 노래방이니 남들도 응당 그러리라 예상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노래방 주식은 내가 투자하자마자 ‘떡락’했다. 이 정도면 주식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살 중인 건 아닐까 싶었다. 돈을 조금 잃었을 뿐인데 노래방 회사에 갈비뼈 몇 개를 내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싸움에 진 하이에나처럼 비루한 기분으로 두 번째 투자처를 찾아 나섰다. 사실 그 후 어떤 기업을 거쳤는지는 일일이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손실의 연속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주식을 시작하기 전에는 파란색이 이렇게 불길한 컬러인지 몰랐다.
 
가성비 호캉스 비용 정도를 잃었을 때는 마구 화가 나면서 오기가 솟았다. 제주도 여행 경비 정도를 잃었을 땐 입맛이 다시는 뜨지 않을 해처럼 저물었고, 삶의 맛 자체가 떫어졌다. 그러나 일본 여행 경비 정도를 날린 후에는 역으로 평정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가끔 아득해질 때면 마음속에서 이상한 속삭임이 들려왔다. ‘까짓 일본, 다녀오진 않았지만 다녀온 걸로 치면 그만 아닌가?’ 하는 식이었다. 방금 이 글을 결론짓기 위해 주식 앱을 열어봤다가 허허허 웃으며 치워버렸다. 평소 ‘없는 돈인 셈 치자’라고 중얼거린 마인드 컨트롤을 사탄이 듣기라도 한 것인지 정말 다 없어지려는 중이었다.
 
영락없이 벼락 거지가 된 지금, 나는 해외 여행에 대한 원대한 욕망을 버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올 하반기까진 꼼짝할 수 없을 것 같다. 실패한 개미인 내가 마음껏 떠날 수 있는 곳은 매일 밤 베개맡의 꿈나라뿐이다. 그런데 의외로 슬프지는 않다. 팬데믹으로 모두의 삶이 정지한 세상보다 나 혼자만 업보 빔을 맞고 정체된 세상이 차라리 행복하기 때문이다. 올여름 미뤄왔던 여행을 마친 후 사람들이 들려줄 이야기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그렇게 생생한 체험담을 들으면 ‘까짓것 다녀오진 않았지만 다녀온 걸로 치기’도 더 쉬울 것 같다. 어거지로 여행을 미뤄온 2년 동안 많은 것을 잃은 줄 알았는데 적어도 인내심 하나는 강해졌다며  나를 위로해 본다.
 
정지음 싫은 것들을 사랑하려고 글을 쓰는 1992년생. 25세에 ADHD 진단을 받은 이후 첫 번째 에세이 〈젊은 ADHD의 슬픔〉으로 8회 브런치북 대상을 수상했고, 〈우리 모두 가끔은 미칠 때가 있지〉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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