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은 징후들
이날로부터 약 한 달 뒤, 나는 수술대 위에 누웠다. 5cm였던 자궁근종이 갑자기 7cm로 커졌는데, 이렇게 변성이 생기고 통증을 유발하는 근종은 계속 문제를 일으키니 제거하는 게 좋다는 것이 의사의 진단이었다. 그래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역류성 식도염과 위염을 달고 사는 내게 복통은 수시로 위치를 바꿔가며 생겼다 괜찮아졌다 하는 존재였다. 수술 날짜를 잡아놓고도 ‘이거(통증) 이러다 마는 거 아냐?’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래도 빨리 수술을 받은 건 단 하나의 이유, 3월 대선을 앞둔 정치부 기자로서 회사 업무에 그나마 지장을 덜 주기 위해서였다. 혹시라도 제일 바쁜 시즌에 또 이러면 곤란할 테니.
수술을 마치고 끙끙대고 있는데, 저녁에 회진 온 의사가 물었다. “엄청 아프지 않았어요?” 그래도 무통 주사 덕분에 좀 나아졌다고 하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수술하기 전에.” 의사의 설명은 이랬다. 커진 근종이 꼬이면서 해당 부위에 염증이 생겼는데, 그걸 바로 제거하지 않아 맞닿은 부위가 꽤 넓게 썩어 있었다는 것. “엄청 아팠을 텐데 왜 참았어요? 바로 수술받았으면 좋았을걸….” 진통제 먹고 핫 팩 붙여가며, 때로는 술 마시니까 괜찮아졌다(?)면서 그냥 넘긴 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프면 정확한 검사를 받고 제대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당연한 명제를 대수롭지 않게 무시했다가 병을 키웠다. 그나마 수술로 깨끗하게 제거되고 항생제를 좀 더 오래 맞는 정도에 그쳐서 다행이지만, 솔직히 아찔했다.
나는 건강에는 늘 지나칠 정도로 자신이 있었다. “나도 좀 쉬고 싶은데 왜 아픈 데도 없어?”라며 배부른 소리를 하곤 했다. 그런데 병가 동안 이런저런 자료를 뒤져보니 나는 아프지 않은 게 아니라 몸이 보내는 경고 신호를 외면한 거였다. 전에 없던 가려움증이 생겨 등이나 뒷목, 허벅지, 팔뚝을 벅벅 긁기 일쑤였는데, 긁은 자리는 손톱 자국 그대로 벌겋게 부어올랐다. 두피가 빨갛게 달아올라 따끔거리기도 했고, 때로는 화장실을 너무 자주 가기도 했다. ‘아, 요새 좀 이상하네’ 하고 말았던 증상은 모두 면역력이 떨어졌다는 징후였다. 몸이 조금씩 녹슬고 삐걱거리기 시작했는데도 계속 과부하가 걸리니 결국 한 군데가 터져버렸나? 아무도 명쾌하게 설명해 주지 않는 자궁근종 변성의 이유에 대해 혼자 이런 결론을 내려버렸다. 그리고 다짐했다. 몸의 사소한 변화도 정밀하게 관찰하고 예민하게 받아들이기로.
대선을 몇 달 앞둔 요즘, 민심도 사람의 몸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장기들과 마찬가지로 절대 실시간으로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이런저런 징후들을 통해 추론하고 점검하고 상하지 않도록 부지런히 관리할 수밖에 없다. 아쉽게도 정부는 늘 한 발짝 늦어왔다. 5년 전 박근혜 정부의 경우 국정농단 보도 이전에 이미 ‘십상시 문건’ 논란과 ‘진박(진짜 친 박근혜) 공천’ 등 민심이 싸늘하게 식어가는 계기가 몇 차례 있었으나 이에 대한 반성이나 쇄신 노력이 보이지 않았다. 몇 개월 후 퇴임하는 문재인 정부에는 단연 부동산 가격 급등이 민심 이탈 요인으로 꼽힌다. 계속된 시장의 불안과 불신에도 “안정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말을 반복했던 정부는 문 대통령 집권 5년 차에야 비로소 부동산 정책을 사과하고 방향을 선회했다. 올해 새로 들어서게 될 정부도 분명 완벽하지 못할 것이다. 당연하다. ‘실책 없는 정부’란 ‘노화 없는 몸’만큼이나 비현실적인 개념이니까. 다만 불완전하더라도 기민하게 변화하는 정부를 보고 싶다. 어떤 계획이 현실과 괴리됐는지, 그래서 어떤 부작용이 있고 어디가 곪아가고 있는지 빠르게 파악해서 달라지려고 노력하는 모습 정도는 새 정부에 기대해봐도 좋지 않을까.
심수미 제48회 한국기자상 대상과 제14회 올해의 여기자상을 수상한 언론 최전방에 서 있는 JTBC 기자. 30여 년간 인권의 사각지대를 취재한 수 로이드 로버츠의 〈여자 전쟁〉을 번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