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우비초 교무실에서 배운 것

올해 내 마음속 최고의 시트콤은 〈우비초 교무실입니다〉다.

 

우비초 교무실에서 배운 것

〈아기공룡 둘리〉를 보며 둘리가 아닌 고길동에게 감정이입하면 어른이 된 거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90년대 작품 〈아기공룡 둘리〉를 아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어른 아니겠냐면 할말 없다). 학교가 배경인 이야기의 중심은 대개 학생이지만, 언제부턴가 교사들의 생활이나 생각에 관심이 커진 것 또한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방증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올해 내 마음속 최고의 시트콤은 〈우비초 교무실입니다〉(이하 〈우비초〉)다. 지상파에도, 넷플릭스에도, 유튜브에도 없는 이 작품의 연재처는 동명의 네이버 블로그다. ‘우비초등학교’라는 가상공간을 배경으로 교사와 교직원의 일상을 코믹한 ‘짤’과 생동감 넘치는 대사로 그려낸 이 ‘짤툰’의 작가는 익명의 초등 교사다.
 
2018년부터 교사 사이에서 알음알음 입소문으로 인기를 끌던 이 작품이 갑자기 널리 알려진 것은 김은숙 작가가 준비 중인 드라마 〈더 글로리〉의 설정 때문이다. ‘학교 폭력으로 피해를 입고 자퇴한 주인공(송혜교)이 가해 주동자가 결혼해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담임 교사로 부임해 처절한 복수를 시작한다’는 기사를 읽으며 나는 이야기의 윤리성을 걱정했지만, 우비초 작가는 주인공을 걱정했다. “복수해야 하는데 연구학교로 선정된 연구부장 송혜교” “복수해야 하는데 에듀파인 틀려서 야근하는 송혜교” “드디어 복수의 기회가 왔는데 관내 만기로 타 학교로 튕기는 송혜교” “4년 뒤 돌아왔지만 코로나 때문에 줌 수업만 하는 송혜교” 등 비장한 복수극을 펼치기엔 너무 바쁘고 온갖 일에 치이는 교사의 상황이 절묘한 ‘짤’과 함께 온라인에서 뜨거운 반응을 얻으며 퍼져나갔다.
 
그러나 〈우비초〉 전편을 정주행한 애독자로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송혜교’ 시리즈는 빙산의 일각일 뿐, 이 세계관의 재미는 여성이 다수인 직군이면서 수업 외 수많은 행정 업무에 시달리는 노동자로서 교사의 삶을 세밀하게 그려낸 데서 나온다. 주말 드라마 등에서 대개 누군가의 어머니로 등장하던 중견 배우들의 캡처 이미지는 우비초의 실세인 관리자급 대화에 자주 쓰인다. 장학사 출신으로 관내 최연소 승진자인 교장 역은 김해숙, 관록 있고 눈치 빠른 1학년 부장 역은 이휘향, 학교 폭력 사건 터질까 봐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생활인성부장 역은 나영희가 ‘캐스팅’되는 식이다. 심드렁함, 난처함, 머쓱함, 우쭐함 등 미묘한 표정 변화를 귀신같이 잡아낸 이미지들은 교과서 신청 소동, 커피믹스 품앗이, 온라인 학부모총회의 방송사고 같은 에피소드와 결합해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그중에서도 ‘연구학교’ 6부작은 교무실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음모와 서스펜스, 정의 구현의 서사를 흥미진진하게 보여주는 수작이다. 승진을 위해 연구학교 프로젝트를 진행하려는 교장과 교감(안내상)의 야욕(!) 때문에 보건교사(김보연)가 독박 쓸 위기에 처하자 불의를 참지 않는 1학년 부장이 반기를 들지만, 교장과 교감은 익명 설문이라는 꼼수로 계획을 밀어붙이고 마침내 보건교사는 전체 메시지 발송이라는 최후 수단을 사용하는데…! 결과가 궁금하다면 우비초 블로그에서 확인하길 바란다.
 
아마도 교사는 세상에서 가장 쉽게 일반화되는 동시에 당연하다는 듯 무한 헌신을 요구받는 직업일 것이다. 어른이 된 사람 대부분이 학교에 다닌 적 있기에 ‘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찰리 채플린의 말과 함께 우비초 교사들의 ‘웃픈’ 하루하루를 따라가다 보면 내 경험을 넘어서는 세계가 보인다. 6학년 여학생들과 친해져보려고 ‘방탄소년단’ 이름을 하나하나 외우는 (그러나 NCT 개념을 이해하는 데 실패한) 교사의 에피소드에는 학생들이 아이돌 노래 틀어달라고 해서 “아이돌 누구”냐고 몇 번 묻고서야 그게 ‘방탄’ 노래임을 알았다는 선생님의 공감 댓글이 달린다. 자신은 나이 들어가면서도 매해 새롭게 만나는 8~13세의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어른들의 마음이 〈우비초〉에 있다. 이 멋진 이야기가 끝나지 않으면 좋겠다.
 
최지은 10년 넘게 대중문화 웹 매거진에서 일했다. 〈괜찮지 않습니다〉와 딩크 여성들의 삶을 인터뷰한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를 펴냈다. 늘 행복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재미있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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