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작가지만 다독가는 아니거든요! 쉬면서 찾은 독서의 맛

9월에는 다시 책 좀 읽어볼까?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기

찾았다! 독서의 맛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의 사람들은 화장실에서 무엇을 읽었을까? 변기에 앉아 샴푸 통 뒷면의 깨알 같은 글자라도 읽지 않으면 지루해 못 견디는 어린이였던 나는 가끔 궁금하다. 궁금한 건 또 있다. 학교 도서실의 반공 도서는 물론, 남의 집 책장의 먼지 쌓인 전집, 버려진 잡지까지 게걸스럽게 읽어대던 어린 독서광들은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을까? 나는 아닌데.
 
지난 몇 년간 내 비밀은 내가 책을 그리 많이 읽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그럴 줄 알았다고?). 어쩌다 책을 내는 바람에 ‘작가’라는 직함이 생겼지만 늘 어색하다. 그럴듯한 타이틀 뒤에 숨겨둔 얕은 지식과 둔감한 사고가 언제 드러날지 두려워서다. 게다가 다른 작가들은 왜 그렇게 책도 많이 읽고 지적인지, 인문학 공부 안 한 사람은 나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가슴이 꽉 조여든다. 사태가 심각해진 건 몇몇 출판사에서 내게 책을 보내주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문학, 철학, 사회학, 여성학 분야의 다양한 신간이 책상 위에 쌓이는 거로도 모자라 방바닥에 탑을 지어나갔다. 그중 친절한 담당자는 내게 미리 메일을 보내기도 했는데, 나는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답장을 공들여 쓴 다음 막상 그 책이 도착하면 펼쳐보지도 못했다. 한번은 유명한 여성 철학자의 책을 받았는데, 내가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건 이름뿐이라는 사실을 실토하지 않느라 무척 힘이 들었다. 그 멋진 책은 내 노트북 바로 옆에 꽂힌 채 6개월 동안 죄책감만 자극하다 옆방 책꽂이로 옮겨졌다.
 
책들로부터 도망친 이유는 무엇보다 내 무지함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였다. 책을 보내는 쪽에서는 (호의적인) 감상평을 SNS에 올려줄 것에 대한 기대도 있을 게 분명한데, 일단 내가 이 책을 이해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어려운 글을 잘 못 읽는 데다 스마트폰 중독자답게 바닥인 집중력으로 이걸 어떻게 다 읽지? 읽고 나서 혹시 내가 멍청한 말을 해버리면 어떡하지? 나이를 이만큼 먹은 데다 명색이 작가인데 읽기도 쓰기도 자신 없으니 앞으로 어떻게 살지? 자괴감에 우울과 무기력이 겹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이 이어졌다.
 
그런데 일하지 않으니 시간이 많았다. 많아도 너무 많았다. 심심했던 어느 날, 따릉이를 타고 도서관에 갔다. 서가 사이를 서성이며 가벼우면서도 신중한 마음으로 책을 골랐다. 나를 나로부터 떼어놓을 수 있는 이야기면 무엇이든 좋았다. 백팩 가득 낯선 책을 담아 집에 돌아오면 부자가 된 기분이었다. 어떤 책은 손도 대지 않은 채 반납했고, 어떤 책은 조금 읽다가 덮기도 했다. 필요해서 고른 책이 아니니 그래도 괜찮았다. 그중에서 나를 특별히 압도한 책은 마거릿 애트우드의 〈그레이스〉였다. 그 유명한 〈시녀 이야기〉를 쓴 페미니즘 문학의 거장, 이 위대한 작가의 작품을 하나도 읽은 적 없다는 것 역시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겠지만) 나 혼자만의 비밀이었다. 혹시 재미가 없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그레이스와 가족들이 아일랜드에서 캐나다로 이주하는 배 위의 숨 막히는 묘사와 함께 뱃전에 부딪히는 물보라처럼 흩어졌다. 〈브로크백 마운틴〉의 원작자 애니 프루의 〈시핑 뉴스〉 역시 우연히 건진 보물이었다. 세상에서 제일 운 나쁘고, 괴상하지만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모인 황량한 섬마을 이야기에 나는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나라는 사람이 너무 하찮게 느껴져 잠이 오지 않는 날 새벽에는 메이브 빈치의 〈체스트넛 스트리트〉를 읽었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에 깃든 아이러니와 기쁨과 슬픔이 서른일곱 편의 단편에 담긴 소설집이다.
 
책이 주는 즐거움과 위안을 온전히 느낀 것은 오랜만이었다. 나는 그냥 읽기만 하면 되었다. 무엇도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어떤 책들은 내가 그냥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어도 괜찮다고, 인간의 삶이란 이렇게나 하찮고 우스꽝스럽지만 누구에게나 자기만 아는 빛나는 순간이 있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그렇게 천천히 기운을 얻어 동굴에서 빠져나왔다. 얼마 전 “슬럼프는 어떻게 극복하세요?”라는 질문을 받은 적 있다. 대체로 극복과는 거리가 먼 인생을 살아왔지만, 그 순간 한 가지 방법은 말해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이 불안하고 막막하게 느껴질 때, 목적 없는 독서는 꽤 괜찮은 약이라고.  
 
최지은 10년 넘게 대중문화 웹 매거진에서 일했다. 〈괜찮지 않습니다〉와 딩크 여성들의 삶을 인터뷰한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를 펴냈다. 늘 행복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재미있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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