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떤 질문은 거울 같아서
」최근 인터뷰 요청의 대부분을 완곡하게 거절하고 있다. 지난해 나를 둘러싼 여러 뉴스부터 생애 첫 에세이집 출간까지 이어지면서 많은 인터뷰를 한 탓일까. 물론 횟수의 문제만은 아니다. 말을 하고 나면 여러 반응이 따라오기 마련인데, 함께 생각해 볼 의견이나 힘이 되는 이야기가 많지만 인터뷰의 어느 한 부분만 인용해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곡해되는 경우도 생겼다. 의견을 말한 적 없는 바에 대해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겠지’ 하는 추측도 여기저기 떠돌았다. 익명으로 쏟아내는 누군가의 말을 이해하고 설명하려 애쓰는 것은, 혹은 상대하지 않고 넘기는 것은 상당한 에너지가 소모되는 일이었다. 체력적으로도, 마음으로도 잠시 지친 내겐 고요를 지나는 시간이 필요했다. 바빠도 최대한 시간을 내 응하던 일들과 동시에 뉴스와 댓글을 보는 일과도 멀어졌다.
그런 나날을 보내던 중 인스타그램 DM이 도착했다. 학교에서 진로와 관련된 인터뷰를 진행해야 하는데 평소 마음으로 응원하던 나에게 삶과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요청이었다. 선뜻 답을 보내지 못했다. 거절은 여전히 미안한 일이니까. 무응답이 거절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메일을 통해 또 한 번 인터뷰 요청을 보내왔다. 그 이메일을 다시 읽으며 하는 쪽으로 마음이 움직였다. 전화 인터뷰가 좋겠다고 답메일을 보냈고, 2주 뒤로 약속을 잡았다.
첫 질문은 ‘삶을 이끄는 나의 목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나는 목표라기보다 매 순간 하고 싶은 것들을 후회 없이 도전하고 경험해 보는 게 내 삶인 것 같다고 답했다. 세 번째 질문은 ‘나와 반대되는 입장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그들을 설득시킬 것인가,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항상 고민하는 부분이지만 지금 드는 생각을 말해주었다. 반대되는 입장을 모두 설득할 수도 없고 모든 이를 설득할 필요도 없다고. 각자 세상을 바라보는 눈도, 경험도, 입장도 다른 것이니까. 다만 상대방이 ‘대화할 마음이 있는 사람’인가, 그리고 나도 마찬가지로 ‘그와 대화할 귀가 열려 있는가’가 중요한 것 아니겠냐고. 때로는 무례한 상대와 싸워야 할 때도 있지만 그런 에너지도 가급적 아끼는 것이 좋은 것 같다고. 폭력에 가까운 반응에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조용히 따라가는 단단함도 필요하다고.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가 내게 혹시 책을 추천해 줄 수 있는지 물었다. 나는 지금 하고 있는 고민이 있다면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생각해 보겠다고 되물었다. 준비한 7개의 질문을 차례차례 던지던 그는 인터뷰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고민을 듣고 나서 나는 세 번째 질문의 배경을 이해했다. 그는 인권과 환경에 관심이 많았다. 그런데 학교에서 이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공격이 따른다고 했다. 편집되고, 재생산되고, 퍼져 나가면서 그도 지쳐 있었다. ‘아직 고등학생인데 벌써 이런 고민을 한단 말이야 ’ 솔직히 놀랐다. 스마트폰 너머에 있는 존재가 그냥 내게 DM을 보낸 10대로 정의할 수 없는, 치열하게 고민하는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부끄럽게도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고등학생일 때는 수능이 최대 고민이었으니 비슷한 고민을 하지 않을까 추측했던 게 오산이었다. 그는 넓은 세상 속에서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동생에게 말하듯 다정하게 건네던 목소리를 차분하게 가다듬었다. “왜 그런 질문을 했었는지 이제 이해했어요.”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이런 고민을 하는 것이라고. 대부분의 친구들이 하는 대로 눈치껏 따라가고 행동한다면 문제가 생기지도 않았을 텐데, 본인에게 의미 있는 것들을 알고 선택하는 특별한 사람이기에 때론 흔들리는 것이라고. 의문이 생길 땐 그렇게 질문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부디 지금처럼 지치는 순간이 올 땐 어떤 의무감이나 책임감보다 가장 1순위로 자신을 생각하고 챙겼으면 좋겠다는 말이 진심으로 나왔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게 왜 이 인터뷰에 응해주었는지 물었다. 내가 누군가의 조언에 힘을 얻고 나아갈 수 있었던 것처럼, 나도 누군가의 인생에 작은 변화의 계기가 된다면 그보다 놀라운 일이 있을까 싶은 게 한 가지 이유였다고 답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전적으로 내 마음을 움직인 당신의 힘이었다고.
인터뷰를 마치고 전화를 끊는데 보지 않아도 지금 내 얼굴 근육이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에게 건넨 말에는 분명 나 자신에게 하는 다짐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생각은 거울 같은 상대를 만났을 때 더욱 또렷해진다. 그가 장문의 문자를 보내왔다. 전화를 하면서 울컥해 버려서 마지막에 말을 다 하지 못했다고. 자신의 가치관이 흔들리는 위태로운 시기였는데 보호막을 갖게 된 기분이라는 메시지였다. 서로 얼굴을 마주한 적 없고, 스무 살 가까이 차이 나는 두 여성이 40분 남짓 전화로 위안을 주고받았다. 그날은 올 들어 가장 더운 여름날이었다. 솟아오른 기온만큼 내게도 더욱 힘차게 내일을 보낼 힘이 생긴 날이었다. 이 여름을 보내고 나면 우리는 더 현명하게 세상을 대할 수 있도록 성장해 있지 않을까. 분명히 그럴 것이라 믿는다.
임현주 듣고, 쓰고, 읽고, 말하는 MBC 아나운서. 좋아하는 것을 하며 신중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 부지런한 나날을 담은 책 〈아낌없이 살아보는 중입니다〉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