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여름 피서에 대한 어떤 마음
」7월은 바캉스의 계절.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굳이 어디에 가지 않는 나조차 해마다 요맘때면 여름휴가 계획을 세우곤 했는데, 올해는 백신을 맞은 다음에 생각해 보기로 했다. 인류가 코로나19 영향권 아래 살게 된 지 1년하고도 반년이 더 흘러가는 지금, 사람들은 지나간 여행의 기억을 더듬어 글로 쓰거나 드라이브에 잔뜩 쌓아 둔 채 잊었던 사진들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내게 있어 최초의 ‘여행’은 일곱 살 때의 일이다. 여름휴가라는 말보다 ‘피서 간다’는 말이 더 익숙하던 시절이었다. 우리 집엔 자가용이 없어서 옆집 영인이네의 하얀 소형차 포니 투를 두 가족, 무려 여덟 명이 함께 타고 갔다. 아저씨가 운전석에, 아빠가 조수석에 타고 뒷좌석의 엄마들이 나와 영인이를 무릎에 앉히면 언니들은 남는 자리에 테트리스하듯 끼어 앉았다. 지금 생각하면 교통경찰의 단속에 잡힌 적 없었던 게 놀라울 만큼 무모한 짓이었지만 그때는 다 같이 한 차를 탄다는 사실에 마냥 신이 났다. 다행히 다음 해 여름이 오기 전, 우리 집도 차를 샀다. 아는 사람에게서 마크 파이브 중고차를 80만 원에 산 아빠는 “이래 봬도 엄청 튼튼하다”는 사실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벨벳으로 된 겨울용 시트가 여름이면 한낮의 열기를 그대로 머금은 채 엉덩이를 달구는 차였지만, 그사이 키가 훌쩍 자란 나는 뒷좌석에 언니와 둘이 앉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우리 여행의 긴 시간은 국도 위에서 흘러갔다. 내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이기에 아빠들은 중간중간 갓길에 차를 세운 채 지도책을 펼쳐 들고 몇 번 국도로 빠져 어디로 넘어갈지 의논하곤 했다. 어떻게 휴대전화도 없이 지도와 도로 표지판에만 의지해 서로를 잃어버리지 않고 목적지에서 만날 수 있었는지 궁금해진 건 내가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보면서도 늘 길을 헤매는 어른이 된 다음의 일이다. 그때의 나는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았다. 부모님은 자신들도 처음인 길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면서도 때가 되면 꼬박꼬박 밥을 해 먹였고, 피서객으로 가득 찬 민박집을 뒤져 어떻게든 빈방을 구해왔다.
햇볕이 정수리를 태울 것처럼 뜨거운 여름날 해수욕을 하다가 배가 고프면 우리는 어른들을 졸라 모래사장 한복판의 매점으로 달려갔다. 초록색 플라스틱 접시에 담긴 미지근한 튀김과 덜 익은 사발면으로 배를 채운 뒤에는 다시 바다로 뛰어들었다. 저녁 시간이 다가오면 엄마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래투성이가 된 우리를 비좁고 엉성한 간이 샤워장에 데려가 박박 씻겼다. 온수 같은 건 나오지 않았다. 얼음장 같은 지하수가 온몸을 때려 춥다고 꺅꺅대면서도 즐거워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시멘트 담벼락에 빨간 글씨로 커다랗게 ‘민박’이라 적힌 슬레이트 지붕집으로 돌아가면 마당의 빨간 ‘다라이’에 수박이 둥둥 떠 있었다. 우리는 뜨끈한 담벼락에 등을 기대앉아 수박을 먹으며 누가 멀리까지 씨를 뱉는지 내기했다. 자다가 깨 깜깜한 밤, 재래식 화장실에 가야 할 때면 그렇게 수박을 먹어댄 걸 후회했지만.
경기도에서 출발해 전국을 두루 도는 여정 동안 나와 영인이 그리고 동갑인 언니들은 종종 짝을 지어 다른 집 차에 탔다. 집마다 보유하고 있는 카세트테이프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 차에서는 카펜터스와 사이먼 앤 가펑클만, 영인이네 차에서는 산울림 노래가 끝없이 흘러나왔다. 어두운 밤 한산한 국도를 달리는 차 안에 울려 퍼지는 어떤 아저씨(그때는 김창완이라는 사람을 알지 못했다.)의 맹맹한 목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이상하게도 몽글몽글해졌다. 여행의 끝이 다가올 때는 같은 노래를 들어도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산울림의 ‘안녕’은 지금도 나를 그 여름의 어린아이로 되돌려놓곤 한다. “안녕 귀여운 내 친구야 / 멀리 뱃고동이 울리면 / 네가 울어주렴 / 아무도 모르게 / 모두가 잠든 밤에 혼자서.”
아빠가 사실은 운전을 싫어하고, 지금의 나만큼이나 붐비는 장소를 꺼리며, 나처럼 집에서 혼자 뒹굴뒹굴하기를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눈치채는 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내가 그때의 아빠와 같은 나이가 돼서야 그 반짝이던 시간이 온전히 부모님의 수고로 만들어졌음을 알게 됐다. 좋은 기억은 에너지 바와 같아서 사는 게 힘들 때마다 꺼내 먹을 수 있도록 쌓아둬야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 있다. 아마 지금의 나는 그 여름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추억 위에서 살고 있는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보다 더 좋은 게 세상에 있을 것 같지 않다.
최지은 10년 넘게 대중문화 웹 매거진에서 일했다. 〈괜찮지 않습니다〉와 딩크 여성들의 삶을 인터뷰한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를 펴냈다. 늘 행복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재미있게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