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나에게도 우울증이 찾아왔다

절대 겪지 않으리라 자신했던 우울증이 내게도 찾아왔다.

 
 
살면서 맞이하게 되는 고비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내릴 수 있을까요? 그리고 그 고비를 지나는 옆사람에게 나는 어떤 존재가 돼줄 수 있을까요? 씩씩하게 살아남아 함께 멋진 할머니가 된 미래를 그려보며, 〈엘르〉가 여성의 목소리로 세상의 단면을 전합니다.
에디터 이마루 
 

살아내줘서 고마워  

대학시절, 가장 친한 친구가 우울증을 앓았다. “나 죽을 거야”라는 소리에 한밤중에 친구 집으로 달려가기 일쑤였다. 끌어안은 채 울고 달래고 화를 내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아무리 친하고 좋아하는 친구라 해도 내심 지쳤다. 이해도 잘 안 갔다. ‘왜 죽고 싶지? 아직 안 가본 곳이 이렇게나 많고, 해보지 못한 일도 많은데…. 스스로 목숨을 끊을 정도의 용기라면 뭐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절대 나는 겪지 않으리라 자신했던 우울증이 내게도 찾아왔다. ‘다 귀찮다’는 생각이 제일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싶었다. 그냥 리모컨 버튼으로 TV 화면을 끄듯 내가 그리고 세상이 확 사라져버리는 상상을 하곤 했다. 수시로 눈물이 났다. 기사를 쓰다가 울고, 전화 통화 때문에 연락처를 뒤지다가도 울었다. 눈물 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가다듬고, 빨개진 눈알을 열심히 굴렸다. 그리고 또 울었다.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다. 시작은 ‘공황 발작’이었다. 한창 바쁘게 일하던 오후, 스마트폰 배터리가 초절전 모드로 바뀌듯 갑자기 눈앞이 흑백이 됐다. 땅에서 누가 끌어당기는 것처럼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심장이 빨리 뛰었다. 내과에서는 심전도에 이상 없다며 정신과에 가보라고 했다. 정신과 의사는 증상을 쭉 듣더니 ‘정말 흔한 병’이라며 처방해 줬다. “스트레스가 제일 크고요. 과로와 수면 부족, 이런 것들이 대표적인 공황 유발 요인이에요. 약 먹으면서 그런 환경을 피하도록 노력하셔야 됩니다.”
 
그럼에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루나 이틀 푹 쉬고 나면 되겠지. 컨디션을 잘 관리하면 금방 나아지겠지. 여전히 주 6일씩 일하고(주 52시간 근무제도 시행 전이었다), 환경은 달라지는 게 없었고, 기껏 처방받은 약도 술자리 핑계로 띄엄띄엄 먹었다. ‘나는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라는 오만함도 깔려 있었던 것 같다. 최근 TV에서 어떤 정신과 전문의가 “콧물이 흐르는 걸 정신력으로 멈추게 할 수는 없잖아요. 그것과 똑같습니다”라고 말하는 걸 보고 ‘내가 정말 멍청했구나’ 하고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증상은 나날이 악화됐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날이 잦아지고, 불면증이 왔다. 사람마다 공황 증상이 다른데, 나는 ‘곧 죽을 것 같다’는 공포는 없었다. 그냥 ‘쿵쿵쿵쿵쿵’, 심장이 빨리 뛰었다. 숨쉬기가 힘들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양손을 가슴에 대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럴 때마다 스마트 워치 화면에 나타나는 심박수는 70회 안팎, 지극히 정상이었다. 그 숫자가 너무 황당해서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
다행히 우울 증상도, 불면증도 없어진 지 꽤 됐다. 더 이상 안정제를 먹지 않아도 된다. 가끔 심장이 빨리 뛸 때면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밖을 산책하면서 주의를 환기한다. 이렇게 되기까지 정신과 치료는 큰 도움이 됐다. 주변 사람에게 정신과 치료를 적극 홍보하고 있는데, 그럴 때마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 정신과 병원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상당히 두텁다는 걸 느낀다. 나 역시 이런 경험을 공개해도 될까, 나중에 혹 어떤 악영향을 받게 되는 건 아닐까 두려운 마음이 아주 없지는 않다.
 
그럼에도 이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지난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20대 여성 비율이 전년 대비 급등했다는 기사 때문이다. 코로나19로 인한 고용시장이 얼어붙으면서 서비스 직종 등으로 내몰렸던 20대 여성들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영향이라고 한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20대 여성 3명 중 1명꼴(29.3%)로 퇴직을 경험했다. 서울시청년활동지원센터가 발간한 ‘코로나19와 청년 정신건강’에 따르면 중증도 이상 우울도를 보인 청년 비율은 36.3%인데, 여성일수록 미래 직업 전망 등에서 부정적으로 답했다. 정부가 ‘20대 여성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라는 시민단체의 구호를 뼈아프게 듣고 대책을 고민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어디선가 힘든 시기를 버텨내고 있을 청년 여성들에게 당부한다. 콧물이 나면 감기약을 사 먹고 이불 속에 들어가 쉬듯, 눈물이 나면 반드시 가까운 정신과를 찾아가시라. 병원마다 조금씩 다르겠지만 당신이 막연하게 생각하는 것보다 진료비는 비싸지 않고, 선생님들은 다정하다. 우울증을 겪고 난 뒤 대학시절의 그 친구에게 “그 시간을 버티고 살아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것은 스스로에게 한 말이기도 했다. 우리, 힘든 시기를 열심히 버티고 잘 살아내서 만나자.
 
심수미 제48회 한국기자상 대상, 제14회 올해의 여기자상을 받은, 언론의 최전방에 서 있는 JTBC 기자. 30여 년간 인권의 사각지대를 취재한 수 로이드 로버츠의 〈여자 전쟁〉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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