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프로 '눕방러'의 방콕 생활

코로나 '블루'라지만 블루는 원래 청량한 색깔이다.

이어지는 ‘집콕’ 생활에 몸이 근질근질한 찰나였다. 자전거로 장을 보고 오는 길에 약간 속도를 냈던 게 문제였을까. 결국 손목이 부러질 정도의 사고가 났고 119에 몸을 실었다.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는 시기였다. ‘병상도 모자랄 텐데’라는 죄책감도 잠시, 통증 때문에 과호흡 증상이 오자 그저 빨리 병원에 도착해 진통제를 맞았으면 하는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모든 일은 일어나게 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최근 몇 달간의 일상이 스쳐 지나갔다. 재택 근무와 각종 행사가 연기되는 상황을 안타까워하면서도 내심 쾌재를 불렀던, 그토록 그리던 저녁이 있는 삶이 드디어 내 것이 된 것 같던 나날들. 그러다 연말에 모든 전시회와 학술대회가 쏟아지듯 밀려 열리는 바람에 11월을 폭풍처럼 보내고 나니 12월에 허탈한 기분과 함께 ‘코로나 블루’가 몰려왔다. 세 아이와 함께 사는 것도 만만치 않은데 윗집 소음에 당최 집중이 안 돼 마음을 정화하는 음악을 틀어놓고 ‘참을 인’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그리던 중 웬걸, 아랫집에서 먼저 편지를 보내왔다. “재택 근무와 온라인 강의로 인해 조용해야 하니 과도한 소리를 자제해 달라”고. 가족과 이웃 간 갈등이 평소보다 배로 증가했다는 뉴스가 진짜였구나! 코로나 방역에도 성공한 평화로운 뉴질랜드에 사는 친구는 그곳에서도 부부 싸움이 큰 뉴스라고 전해줬다. 이케아는 아예 ‘집은 가장 안전한 곳이어야 합니다’라는 문구를 통해 가정폭력을 고발하는 광고를 내보냈다. 이 울퉁불퉁한 우울감이 내 것만이 아님은 분명하다.
 
“과호흡은 더 위험합니다. 숨 천천히 쉬세요.” 구급요원의 반복되는 경고에 정신이 번쩍 든다. 출산 때 연습했던 복식호흡, 평소에 명상한다며 흉내 냈던 들숨날숨 인지법을 끌어내는 순간, 가장 귓가에 울린 말은 법륜스님의 “고통은 지난 밤 꿈처럼 탁 놓아버리세요”다. 다행히 수술을 면하고 침대에 누워 음성 인식으로 밀린 일을 처리하려 했지만 집중하지 못하는 의식은  다시 또 스님 말씀에 의탁한다. “물에 빠진 김에 ‘진주조개’를 줍자. 이혼했을 때, 배신 당했을 때만 깨칠 수 있는 도리가 있다. 깨달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알아차리느냐 알아차리지 못하느냐에 따라서 세세생생(몇 번이고 다시 환생한다는 불교 용어) 육도를 윤회하며 헤맬 수도 있고, 단박에 해탈할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굳이 다친 손목 때문에 지금 침대에 누워 있는 것만은 아니다. 나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프로눕방러’다. ‘집콕’했던 내내 방구석에 누워 가장 많은 일을 해치웠다. 베른트 브루너는 저서 〈눕기의 기술-수평적 삶을 위한 가이드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침대에서 일했다고 알려진 문화계의 유명 인사는 프루스트만이 아니다. 마크 트웨인도 그중 하나였다. 누워 있는 것은 이들이 생각에 몰두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윌리엄 워즈워스는 완전히 깜깜한 한밤중 침대에 누워 시를 쓰다가 종이가 없어지면 처음부터 다시 적었다. 말년을 파리에서 보낸 하인리히 하이네도 질병으로 침대에서 글을 썼다.” 섬광처럼 내 마음에 안식을 준 구절이다. 그렇지, 눕기도 기술인걸. 수평적 삶이 얼마나 큰 평화를 가져다주는지, 자꾸 누워 있는 내게 핀잔을 주는 남편은 모를 것이다.
 
코로나 ‘블루(Blue)’라지만 블루는 원래 청량한 색깔이다. ‘환기 블루’라는 말을 만들어낼 정도로 신비하고도 섬세한 점면화 작품을 창조하는 화가 김환기를 떠올려보자. 그의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것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이다. 호안 미로의 ‘블루’ 연작 시리즈는 또 어떤가. 미국 MoMA에서 포스터를 구입해 표구까지 한 이 그림은 볼 때마다 흡족하다.
 
코로나도 사고도 모든 것은 일어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관점의 전환이라는 진리를 침대에 누워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면 평행 우주의 저 다른 세상에서는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리라. 그러니 어차피 일어날 일이라면 괴로움 없이 맞이하는 것이 중요하다. 언젠가부터 심심찮게 들리는 ‘세계관(Narrative Universe)’이라는 단어처럼. 트랜스미디어에서 각각의 개별 이야기를 하나로 통합해 이해하는 토대를 지칭하기 위해 만든 이 단어는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이야기가 가능한 공간이란 의미에서 우주(Universe)라고 표현되기도 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가 대표적이다. 실제로 ‘우주론’ 도래의 증거가 여기저기 보인다. BTS의 신곡 ‘Dynamite’ 안무 뮤직비디오가 중계된 게임 ‘포트나이트’ 속 공간처럼 가상과 현실이 상호작용하며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메타버스’,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가 개발한 팬 커뮤니티 플랫폼 ‘위버스(Weverse)’, 오픈 AI를 비롯해 전기차와 관련된 모든 기술을 융합하는 세계를 구축한 ‘테슬라버스(Teslaverse)’. 모두 ‘우주’를 표방한다.
 
그렇다면 2020년은 내게 그 어느 때보다 지구인으로서 산 한 해가 될 것이다. ‘코로나’라는 전 지구 차원의 재난에서 그 어느 때보다 지구를 가장 많이 생각했지만 우울의 늪에 빠져 허우적댔고,  갑작스러운 사고는 이 순간이 가장 소중하다는 것. 그래서 죽을 것을 알면서도 열심히 산다는 것을 한 번 더 깨닫게 하는 ‘진주조개’를 내게 건네줬으므로. 그러니 이제 우울에서 벗어나 달릴 차례다. 우주로 간 내 ‘부캐’처럼.  
 
이원진_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공부했고, 10년간 기자로 일했다. 〈니체〉를 번역하고, 〈블랙 미러로 철학하기〉를 썼다. 현재 연세대학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철학이 세상을 해독하는 가장 좋은 코드라 믿는 워킹 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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