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기꺼이 혼나고 싶다

2021년 나의 목표는 '기꺼이 혼나기'로 정했다.

10년쯤 된 얘기다. 친구 따라 전주국제영화제에 갔다가 친구의 친구들과 어울려 떠들썩하게 놀았다. 거기서 처음 만난 A가 영화 시나리오를 쓴다는 말을 듣고 반갑게 말을 건넸다. “멋있다, 나도 시나리오 작가가 꿈이었어.” 그가 반색하며 나에게 물었다. “그래? 하루에 몇 시간이나 썼어?”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쓰긴 뭘 썼나, 두어 줄 쓰다가 지우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서너 줄 쓰다가 또 지우면서 시간만 보냈지. 우물쭈물하는 사이 A가 시니컬하게 말했다. “쓰고 싶다고 생각만 하는 거랑 매일 조금씩이라도 쓰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야.”

 
솔직히 속으로 ‘누가 그걸 모르나?’라고 볼멘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안 써지는 걸 어떡해. 그때는 진도가 나가지 않는 이유를 잘 몰랐다. 이제 생각해 보면 명확하다.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가 지나치게 높았던 거다. 몇 줄만 써도 이미 ‘이거다’ 하는 느낌이 팍 와야 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동안 봐온 위인전이나 신문, TV에 나온 성공 스토리에는 거의 대부분 천재적 재능이 기본으로 깔려 있었다. 내가 아직 몰라서 그렇지, 나에게도 어느 순간 그 천재적 재능이 발현될 거라고 기대했다. 만약 그런 재능이 없다면 애초에 시작도 말아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마치 땅에 곡괭이 한번 제대로 찔러보지도 않고 이 땅이 비옥할지 아닐지, 씨를 뿌려도 될지 말지 앉아서 고민만 하는 농부였던 꼴이다. 이제는 안다. 하늘이 내린 천재 작가 같은 건 없다는 것. 비문투성이에 맞춤법이 틀리더라도 일단은 끝까지 쭉 써보고 수없이 고쳐야 한다는 걸.
 
이 친구에게 혼나면서 ‘꾸준히 한다는 것’의 필요성을 느꼈다면, 기자가 되어 실제 업무를 하면서는 ‘혼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숱한 방송기자 지망생들은 내게 묻는다. “카메라나 사람 앞에서 떨지 않고 말하려면 어떻게 하나요?” 경험칙을 빌려 자신 있게 답한다. “하다 보면 늡니다.” 다만 혼자 해선 안 된다. 10년째 방송국에서 일하는 나도 여전히 카메라 앞에서 종종 머리가 하얘진다. 사람들 앞에서 북 토크를 하다 벌렁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심호흡을 하곤 한다. 기자 초년병 시절엔 더 심각했다. 모 선배는 “네가 수줍고 불안해하는 게 화면에 다 보인다”면서 ‘공주병(?)’을 키워보라는 조언을 해줬다. 화면 앞에서 당당하려면 평소에도 자신감에 차 있어야 한다는 소리다. 타사 라디오 뉴스를 섀도 리딩(따라 읽기)도 해보고, 혼자 있을 때 마치 생방송 현장에 있듯이 눈앞의 현장을 묘사해서 읊어보기도 했다. 집에선 청산유수지만 실전에선 별 진전 없는 날이 꽤 반복됐다. 그러다 2016년 ‘법조비리’ 사건이 터졌다. 거의 매일 검찰청 앞에서 연결하고 출연하면서 혼나고 격려받고 혼나고 격려받는 날이 이어졌다. 어느 순간 앵커의 돌발 질문에도 자연스럽게 대처할 수 있었다. 혼자만 연습하지 말고 남에게 객관적 평가를 받으면서 고쳐나가야 하는구나, 그것도 띄엄띄엄 하지 말고 집중적으로 매일 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구나, 이때 절감했다.
 
운동도 마찬가지. 2020년, 코로나19 덕에 꼼짝없이 재택 근무를 하면서 ‘홈트’를 시작했다. 유튜브 영상을 보면서 하루에 30분씩 유산소운동을 했다. 이런저런 응용 동작에 조금씩 재미를 붙이면서 1.5k이었던 아령 무게도 3kg으로 늘리고, 야금야금 운동기구도 마련했다. 체성분 체중계를 사서 매일 몸무게를 쟀더니 체지방이 꽤 빠졌다. 미약하나마 달라진 스스로에게 뿌듯함을 느끼며, 사회적 거리 두기가 조금 완화됐을 때 일대일 필라테스 수업을 들었는데…. 선생님한테 혼났다. “잘못된 자세로 하면 이렇게 승모근만 커지는 겁니다.” 기본적으로 꾸준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제대로 성장하려면 나를 객관적으로 평가해 줄 누군가도 반드시 필요하다. 선생님은 때로 눈물이 찔끔 날 지경으로 나를 몰아붙인다. 그러고 집에 돌아오면 똑같은 동작인데도 혼자 할 때는 자극을 못 느꼈던 근육들이 뻐근해져 있다.
 
그래서 2021년 나의 목표는 ‘기꺼이 혼나기’로 정했다. 혼나고 때로는 격려받으면서 성장하고 싶다. 특히나 ‘사회적 거리 두기’로 물리적으로 떨어진 사람들은 커뮤니케이션 방식에서 전보다 조심스러워졌다. 예전 같으면 얼굴 보고 대화하면서 눈치껏 ‘비언어적 의사소통’으로 해결했을 문제들이 이제는 여지없이 활자나 영상으로 기록된다. 사소했을 법한 지적도 이렇게 되면 무게감이 커진다. 아예 서로가 문제를 직접 거론하지 않고 회피하려 한다. 하지만 조직이 됐든, 나 스스로가 됐든 전보다 발전하려면 우리는 더 활발히 의견을 주고받아야 한다. 외면한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는 건 아니고, 혼자 자아도취에 빠져 있는 건 실전에선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 내게 큰 깨달음을 줬던 A는 데뷔작부터 호평받으며 감독으로 승승장구하고 있다. 그 역시 꾸준한 노력뿐 아니라 지속적으로 영화판에 몸담으며 선후배들의 조언을 적극 흡수한 결과다.
 
심수미_ 제48회 한국기자상 대상, 제14회 올해의 여기자상을 받은, 언론의 최전방에 서 있는 JTBC 기자. 30여 년간 인권의 사각지대를 취재한 수 로이드 로버츠의 〈여자 전쟁〉을 번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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