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은 음악가가 그러하듯 나 역시 여름과 가을에 행사 공연이나 페스티벌을 하고, 추워지면 연말 콘서트를 준비했다. 새해가 밝으면 1, 2월을 맞게 되는데 보통 이때 여행을 많이 다녔다. 고향 집에 가거나 간단하게 국내 여행을 가기도 좋고 2~3주쯤 되는 긴 외국여행을 계획하기에도 공연 비수기가 적당하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한 해 동안 잘 지내온 나에게 주는 선물 같은 것이랄까. 그래서 가을이 왔을 즈음 항공권을 예매해 두고 겨울 동안 공연을 신나게 달린다. 성취감과 피곤함이 몰려올 때쯤 여행 날짜가 다가온다. 어두운 비행기에 몸을 구겨넣고 이륙한다. 비행기 안에서 잠든 사람들 틈으로 그동안 미뤄둔 영화를 보며 엉엉 울고 있으면 ‘그래, 이게 사는 거지’ 싶었다. 낯선 여행지에 도착해 부은 다리와 얼굴로 체크인을 한 뒤 근처 카페와 술집에 들어가 뭐라도 한 잔 마시면 여행의 시작. ‘이 한 잔을 마시려고 인생을 사는 거지’라고 또 생각했다.
얼마 전부터 스마트폰이 느려졌다. 역시나 용량 탓이었다. 이것저것 지우다가 결국 지우고 싶지 않은 마음에 외면했던 여행 카테고리를 오랜만에 열어보았다. 우버와 리프트를 지우고 숨을 몰아쉬었다. 네온 조명으로 꾸민 특이한 택시를 몰던 택시 운전사가 떠올랐다. 내 것이 아니라 더 아름답고 애틋한 차창 밖 풍경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여행할 수 있을 때 다시 깔면 되겠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더 여행 앱을 지우기 싫었다. 하지만 한번 지우기 시작하니 마음이 강해져서 해외 맛집을 찾아주는 앱을 지웠다. 항공사 앱도 쉽게 지웠다. 정말 미련을 버려야 새로운 기회가 오겠지? 하는 이 웃긴 마음은 뭘까. 이왕 이렇게 된 거 1년 동안 쓰지도 못했던 데이팅 앱(들)도 지웠다. 여행과 연애를 빼니 내 스마트폰이 다시 쌩쌩 돌아가기 시작했다.
올해를 돌이켜봤을 때 가장 강하게 남아 있는 기억은 8월 중순 이후 겪었던 2.5단계의 날들이다. 본능적으로 두루마리 휴지와 라면을 샀다. 편의점 문 손잡이를 잡는 것도 싫었고, 아주 작은 것만 만져도 손 소독제를 발랐다. 길거리에서 마스크를 안 쓴 행인과 스쳐 지나갈 때는 숨을 참았다. 집에 누워서 아무것도 못하고 코로나 관련 뉴스만 보고 있었다. 내가 어떤 삶을 꿈꾸든 이뤄질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과 슬픔으로 아무런 의욕이 생기지 않았다. 2.5단계가 풀린 다음 날, 너무 그립던 정독도서관 주변 길을 걸으러 갔다. 햇살로 따끈한 벤치에 가만히 앉아 세상과 사람을 구경했다. 가로수와 잔디는 어느새 연하게 가을빛을 띠었다. 높고 큰 하늘이 어느 날 없어지는 건 아닐까 계속 올려다보았다. 데이트하는 연인들의 세련된 옷차림과 사람들의 걸음걸이를 보며 사람 속에서 혼자일 수 있는 행복에 감사를 느꼈다. 그리고 ‘그때 정말 위험했지. 하지만 우리는 잘 넘겼어’ 하는 날이 어서 오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한 해 동안 하지 못했던 일을 남은 평생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아주 조금 남은 2020년 동안 실제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놓친 신작 영화들의 VOD 서비스를 보는 것. 아직도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못 봤다니. 연말 전에 꼭 볼 것이다. 예능 프로그램 〈미쓰백〉과 〈히든 싱어〉 이소라 편도 아직 못 봤다. 요즘은 아주 작은 일에도 눈물이 나오니 티슈를 안고 맥주를 마시며 봐야겠다. 남은 2020년 동안 기대되는 일도 있다. 자우림과 이소라 콘서트 예매에 성공했고, 나도 내 연말 공연을 준비할 것이다. 이제 공연이란 언제 취소돼도 놀랍지 않지만, 그래도 취소되지 않을 경우를 위해 보는 것도, 하는 것도 온 힘을 다해 준비할 것이다.
올해의 잘한 일은 이동식 욕조를 산 것. 〈보건교사 안은영〉에서 안은영이 괴로운 심신을 달래기 위해 반신욕을 하는 모습을 보며 구매했는데 확실히 효과가 있다. 배스 솔트를 퐁당 빠뜨리고 어디로 분출하지 모르는 몸과 마음을 뜨거운 물에 담가 삶아버리면 묘하게 화가 풀리는 기분이다. 작은 뉴스 하나에 하루가 무너지기도 하고, 때로는 작고 반짝이는 희망이 생기기도 한다. 나에게 계속 살아갈 미래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주어진 인생을 살아가고 싶고, 친구들과 함께 나이 들고 싶다는 마음이 너무도 간절하다. 그러기 위해 내가 무얼 할 수 있을까? 우선 생기를 잃지 않을 것. 그리고 나에게 남은 순수하고 선한 마음을 지킬 것. 죽일 일도, 죽어야 할 일도 없이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상상하는 존 레넌의 가사를 떠올린다.
김사월_ 메모 같으면서도 시적인 노랫말을 쓰는 싱어송라이터. 2020년에 에세이 〈사랑하는 미움들〉을 썼고, 세 번째 솔로 앨범 〈헤븐〉을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