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베카 솔닛의 베스트셀러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에 이어 한국에서 나와야 할 책은 아무래도 〈남자들은 자꾸 나를 후려치려 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것이 일부 운 나쁜 여성만 겪는 일이 아니란 걸 알고 있다. 여성 혐오 발언으로 악명 높은 남성 예능인이 토크쇼에서 대학 시절 예쁘기로 소문난 여학생의 외모를 깎아내려서 사귄 적 있다고 자랑스럽게 떠드는 걸 본 적이 있다. 감미로운 발라드를 부르는 남자든 자식 사랑을 어필하는 남자든 예능 프로그램에서 여성 출연자가 뭐만 하면 “무섭다ㅎㅎ”라며 웅얼거리며 초를 치는 모습도 종종 본다. 고작 저런 게 무섭다면 대체 숨은 어떻게 쉬고 사나 싶지만, 그들이 진짜 무서워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남자들이 여성, 특히 젊은 여성의 일거수일투족에 은근슬쩍 부정적 태도를 드러내는 것은 스스로 평가자의 위치를 차지함으로써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관계의 주도권을 잡아 권력을 휘두르는 흔한 전략이다. ‘무서워서’가 아니라 ‘거슬려서’ 하는 말이고, 너는 내가 인정하는 여자의 규범에서 벗어났으니 얼른 그 틀 안으로 들어가라는 뜻이다.
문득 좀 더 많은 여성의 경험을 듣고 싶었던 나는 인스타그램으로 소개팅과 ‘썸’, 연애관계에서 여성을 깎아내리는 남자들의 말에 관한 제보를 받아보았다. 딱 24시간 동안 50여 명의 여성이 답을 보내왔다. 예상대로 아모르 파티가 아니라 ‘대환장’ 파티였다.
“넌 너무 기가 세” “여자가 기 세면 남자들이 싫어해” 등 과연 지상에서 가장 약한 것이 한국 남자의 ‘기’라는 학설을 증명하는 제보가 제일 먼저 쏟아졌다. “맞는 말인데, 좀 흥분한 것 같아” “네가 조금만 덜 똑똑했으면 좋았을 텐데” 등 여성의 이성과 지성을 의심하고 불필요한 것으로 취급하다 못해 ‘여자’로서는 약점인 양 깎아내린 멍청이들의 사연 중 가장 흥미로운 사례는 다음과 같다. “소개팅남에게 노암 촘스키 책을 본다고 하자 ‘여자가 그런 책 보면 자꾸 따지려고 들어서 피곤한데’라는 말을 들었어요.” 촘스키가 그런 책이면 ‘안 그런 책’은 뭘까, 하루키? “연애는 괜찮지만 너랑 결혼은 안 돼” “넌 연애 상대로는 별론데 결혼하기엔 좋은 타입이야”는 나란히 김칫국 원샷 부문을 석권했다. “넌 애교가 없어서” “조금만 덜 예민하면 인기 많을 텐데” 등 고전적 진상 부문과 “네 얼굴 내가 봐줘서 예쁜 거지 사실 별로야” “친구에게 제 사진을 보여줬는데 안 예쁘다는 반응이 나오자 ‘그래도 착해’라고 말했다며 자랑하듯 전해주더라고요” 등 ‘셀프 개념남’ 등극 부문의 경쟁도 치열했다. 2015~2018년 한정 유행 멘트도 빠지지 않았다. “살짝 비치는 블라우스가 싫다며 입지 말래서 그거 데이트 폭력이라고 했더니 그러더라고요. ‘너 메갈이야?’”
무엇보다 가장 많은 사례는 외모에 관한 지적이었다. 화장해라, 살 빼라, 살찌워라 등 이들에게 쏟아진 온갖 말을 읽다가 눈물이 핑 돌았다. “첫 연애 때 ‘얼굴은 예쁜데 비율이 약간 아쉽네’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별 이유는 내 비율 때문인가 하여 7kg 넘게 빼고 생리가 반년 넘게 끊겼어요. 원래도 정상 체중 이하였는데 그냥 무시할걸, 바보 같고 어려서 그랬던 기억이에요.” 나 역시 연애할 때나 연애하지 않을 때나 오랫동안 외부의 남성 시선에 자신을 맞추려 했던 기억이 있기에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메시지들을 읽으며 속상하고 분통이 터졌지만, 이제 그들도 나도 그런 말들이 얼마나 헛소리인지 알고 있다는 게 반갑기도 했다. 그리고 2021년에는 어떤 여성도 그 따위 말 때문에 자신을 의심하거나 미워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남자에게 ‘무서워’라는 말을 듣는다면 당신은 잘하고 있는 것이다.
최지은_ 10년 넘게 대중문화 웹 매거진에서 일하며 글을 썼다. 〈괜찮지 않습니다〉와 딩크 여성들의 삶을 인터뷰한 〈엄마는 되지 않기로 했습니다〉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