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류세’의 시대에 여성으로 사는 법
바이러스는 여성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비인간(동물)을 통해 인간에게 들어온 비인간(바이러스)이 역설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차별과 격리, 혐오의 철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있기 때문이다. 신종 코로나의 원인이 동물 살육 등의 환경파괴와 자본주의 가속 문명으로 인한 지구 온난화에 있다는 건 상식이다. 이런 질병의 주기적 창궐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야생동물의 서식지를 함부로 침입하고, 매년 500만 마리의 가축을 살처분해 온 지구 인간이 뿌려놓은 씨앗이다. 이렇게 인간 활동에 의해 지구의 자연환경에 유의미한 변화가 초래된 시대를 ‘인류세(Anthropocene)’라 부른다. 그런데 가만, 지구환경 위기를 만든 건 누구인가. 미국 페미니즘 철학자 도나 해러웨이가 볼 때 ‘인류세’라는 표현은 그 의도부터 미심쩍다. ‘모든 인간’, 예를 들어 아마존 유역에 사는 토착민들은 화석 연료를 과도하게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량 탄소 배출을 해온 선진공업국 약 13개국, 전 세계 인구의 5분의 1만이 지구 온난화에 가장 큰 책임을 안고 있다. 그뿐인가. 근대의 보편적 ‘인류’에 여성이 들어간 적은 없다. 인류의 표본은 언제나 도시화된 백인 남성이었다는 점을 보면 여성은 동물과 식물, 지구와 더불어 철저히 ‘비인간(Non-Human)’으로 분류됐다. 그래서 인류세의 다른 별명은 ‘서구 백인 남성의 반성문’이다.
해러웨이는 이참에 여성과 인종 차별, 환경 문제 등 모든 위기를 타개하는 시대의 이름을 다시 붙이자고 제안한다. 그 새로운 시대의 이름은 ‘크툴루세(Chthulucene)’가 어떨까? 크툴루세는 필멸의 존재자가 서로에 대해 서로와 함께 위태로운 관계에 있는 시대를 뜻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바이러스를 적으로 보고 박멸하려는 시도는 할 필요도, 효과도 없다. 인간이 동굴 속에 잠자고 있던 바이러스의 코털을 건드린 것일 뿐 바이러스는 무죄다. 모든 공생관계엔 조금씩 적의가 깔려 있기에 적당한 ‘거리 유지’가 필요하다. 모든 것을 인간 중심으로 재단하고 묶으려 애쓰지 말고 그들과 잘 살고 잘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간 아기를 만들지 말고, 비인간 친족을 만들자!”는 해러웨이의 통 큰 제안은 통쾌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21세기 페미니즘이 추구하는 몸의 정치는 실뜨기 놀이, 즉 인간뿐 아니라 비인간, 유기체, 인공물, 테크놀로지를 포함해 모든 관계가 뒤섞이는 ‘존재론적 안무’다. 해러웨이는 어슐러 르귄 같은 여성 SF 이야기꾼을 그 실뜨기의 안내자로 편애하지만, 우리에게도 김보영, 김초엽, 정세랑, 듀나, 정소연, 전삼혜 등의 SF 스토리텔러이자 존재의 안무가가 포진해 있다.
지난해 말부터 “혼자는 외롭고, 함께는 괴롭다”는 구절을 자주 되새긴다. 마침 해러웨이는 최근 〈곤란함과 함께하자 Staying with Trouble〉는 책을 펴냈다. 은유적인 ‘질병X’와 함께 공생하며 곤란을 살아내려면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바이러스 재난영화 〈컨테이젼〉엔 우리가 손으로 매일 얼굴을 3000번 만진다는 통계가 나온다. 또 다른 통계에 의하면 우리는 스마트폰을 일평균 2500번, 헤비 유저들은 5000번까지 만진다. 그리고 바이러스는 이 똘똘한 금속 표면에 살기를 아주 좋아한단다. 이토록 놀라운 위치 선정이라니! 역시나 바이러스는 항상 우리와 가장 친밀한 곳에 있다.
WRITER 이원진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공부했고, 10년간 기자로 일했다. 〈니체〉를 번역하고, 〈블랙 미러로 철학하기〉를 썼다. 철학이 세상을 해독하는 가장 좋은 코드라 믿는 워킹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