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어느덧 21세기를 더 오래 산 사람 || 엘르코리아 (ELLE KOREA)
SOCIETY

[엘르보이스]어느덧 21세기를 더 오래 산 사람

20세기와 21세기의 중간에서

이마루 BY 이마루 2023.12.07
어느덧 21세기를 더 오래 산 사람  
해가 바뀌는 시점에서 생각을 정리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지금 내 나이인 마흔여섯 살이 흥미로운 분기점이라는 사실이다. 1977년생인 나에게 2023년은 20세기와 21세기를 산 기간이 각 23년씩 동일해지는 해였다. 서른이나 마흔처럼 개인의 나이가 어떤 숫자를 꽉 채우고 지나갈 때 그것에 대해 고찰해 보는 시선은 응당 안을 향하곤 한다. 어떻게 살아왔나, 이 나이에 기대했던 바는 이뤘나,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까 하는 식으로 말이다. 애매하기 짝이 없어 그런 의미 부여 없이 지나갈 줄 알았던 마흔여섯, 세기말과 세기 초를 같은 기간 살아온 시점이라는 뜻밖의 발견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바깥으로 향한다. 내가 살아온 세상은 어떻게 변해왔고, 어떻게 변해갈까? 도화지 위에 물감을 짜고 반을 접었다 펴는 데칼코마니처럼 왼쪽과 오른쪽에 동일한 기간이 존재하지만 양쪽 그림은 사뭇 다르다.
지난 여름 휴가지였던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프리마베라 사운드 음악 페스티벌에 갔다. 켄드릭 라마, 할시, 로살리아 같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헤드라이너로 펫 숍 보이스, 블러, 뉴 오더, 디페쉬 모드가 올라 있었다. 30년 전인 90년대에 이미 전성기를 누린 팀들이다. 특히 블러의 공연을 보면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블러는 1997년에 처음이자 마지막 내한 공연을 하고 그 후로 한국을 방문한 적 없는데, 당시 대학 3학년이던 내가 1997년의 현장에 있었다. 마치 유리병에 자신을 통째로 넣어 바다로 띄워 보낸 편지를 읽는 기분이었다. 26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그 시간만큼 늙어버린 데이먼 알반과 내가 무대 위아래에서 마주 섰다. 그 사이에서 노래만 나이를 먹지 않고 있었다.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들었던 음악은 얼마나 힘이 센지, ‘Song 2’ 전주의 기타 리프  5초만으로도 20대 초반의 신촌과 홍대 풍경이 소환돼 왔다.
세기말, 내가 편지 속에 넣었던 메시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세상은 점점 나아진다”일 것이다. 역사가 정반합의 궤적으로 나아간다면 그 시기에 마침 세계가 발전하는 트랙을 타고 있었던 건지, 어렸던 내 현실 인식이 피상적이라 두루뭉술하게 긍정적이었는지, 미래에 대한 기대가 많던 시기라 꿈에 들뜬 필터로 바라봤는지는 모르겠다. ‘이렇게 입으면 기분이 좋거든요’로 대변되는 우리 세대, 1970년대 초·중반 태생의 특징일 수도 있다. 이전 세대에 비해 경제적 궁핍이나 독재정권의 잔혹함은 덜 겪고 한창 성장하던 경제와 정치 민주화의 수혜를 누리며 자라 더 낙관적이었을지도. 물론 IMF 때문에 졸업을 미루거나 해외 연수를 취소하는 각자의 사정이 있긴 했지만, ‘각자도생’이 당연한 시대정신이 되기 전에 어른이 됐다는 점에서 우리는 운이 좋았다. 게다가 20대에 참여한 두 번의 대선에서 연이어 내가 투표한 진보 성향의 대통령을 당선시켰다는 성취감은 더 어린 세대의 친구들과 대화해 볼 때 결코 흔한 경험은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은? ‘세상은 점점 나아진다’는 명제를 여전히 믿고 싶지만 고개를 끄덕이기는 어렵다.  
 
고등학생이나 대학생, 취업준비생 대상으로 강연할 때가 있다. 그들의 진로 고민에 내 경험과 통찰을 최대한 동원해 도움을 주려 애쓰지만 기본적으로 미안한 마음이다. 내가 기울였던 노력 이상으로 그들도 애쓰고 있을 텐데, 지금의 현실이 어려운 것은 결코 그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아서가 아닐 텐데. 복잡한 마음으로 이런 말을 덧붙인다. “결과가 나쁘더라도 스스로를 너무 탓하지 마세요.” 개인의 역량과 상관없이 신입사원으로 사회에 진출해서 단단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길이 좁아졌다. 그건 누군가의 부족함이 아니라 그가 속한 시대와 세대 문제이고, 굳어진 계급의 문제이고, 사람을 한낱 부속으로 취급하는 시스템의 문제라는 게 운 좋게 살아남아 어른이 된 나에게는 선명하게 보인다.
주변의 작가나 예술가들, 출판계 사람들과 만나면 다들 확연하게 줄어든 문화예술 예산과 지원금을 걱정한다. 내년부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어린이, 노인, 장애인, 다양한 시민들이 지식을 습득하고 사회활동을 나누던 은평혁신파크는 폐쇄되고 그 자리에 대형 쇼핑몰 설립이 거론된다. 40시간으로 정해져 있는 주당 근로시간을 최대 52시간에서 60시간으로 늘리는 논의가 진행 중이다. 최저임금은 9860원으로 올해보다 240원 오르는 것으로 결정됐다는데, 이미 반영된 지하철과 버스요금 인상분 300원보다 적다. 아아,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와 심각한 해수 온도 상승, 전 세계적 우경화, 깊어지는 차별과 혐오,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학살과 이에 대한 서구 정치권의 방관까지는 아직 언급도 못 했는데 지면이 부족하다.  
세상이 나빠지고 있다는 증거를 쉴 새 없이 댈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사는 일을 멈출 수는 없다. 내년부터 나는 21세기를 더 오래 사는 사람이 된다. 좋았던 옛날을 그리워하기만 할 일이 아니라 내가 속한 현실을 더 낫게 만들려는 노력을 미미할지라도 포기할 수 없다. 시대를 역행하는 듯한 ‘좋은 걸 좋다고 말하기’가 모토인 팟캐스트를 계속해 나가는 일도 그 노력의 일환이다. 내가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친절하기를, 그들이 각자의 절망과 싸우다 쉴 때 힘이 될 수 있는 글과 말을 들려줄 수 있기를,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해야 할 몫을 다하기를 바란다. 참 애매한 마흔일곱 살의 새해는 어쩐지 서른이나 마흔이 될 때보다 비장하게 맞이할 것 같다. 아 참, 우선은 해가 바뀐다고 해서 한 살을 더 먹는 게 아니라는 변화에 적응해야 하겠지만.
 
황선우
오랜 시간 잡지 에디터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의 일과 몸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를 전하는 운동 애호가. 인기 팟캐스트 〈여둘톡〉 공동진행자로 지면을 넘어 방송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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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이마루
    아트 디자이너 민홍주
    디지털 디자이너 오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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