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창업한 회사에서 도망쳤다 #여자읽는여자 || 엘르코리아 (ELL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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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창업한 회사에서 도망쳤다 #여자읽는여자

라효진 BY 라효진 2023.11.14
외주 작업으로 창업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1954년생부터 1997년생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창업가들을 만나 회사를 만들고 키워온 과정을 듣는다. 사업을 시작하게 된 계기도 사업 아이템도 각자 다르지만 1시간 30분 정도 진행되는 인터뷰가 마지막에 다다를 때 내가 진심을 담아 던지는 공통 질문이 있다. “어떻게 그 시간을 버티셨어요?”
 
 
첫 시작은 공평하게 미약하다. 아무리 지금은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기업이어도 처음부터 대단한 회사는 없다. 시장에 브랜드를 알리고 수익을 내고 회사를 키워가기 위해서는 숱한 삽질과 궤도 수정이 뒤따른다. 무언가가 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되지 못한 불확실의 시간을 버텨야 한다. 그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을까.
 
버티는 이유가 궁금했던 것은 내가 버티지 못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창업했던 회사에서 도망쳐 나왔다. 좋아하는 일로 창업을 했는데 행복하지 않았다. 내 일을 직접 만들어간다는 환희와 보람의 순간도 있었지만 그건 찰나였다. 대부분의 시간은 아침에 눈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문서와 사람과 씨름하며 보냈다. 창업은 하고 싶은 일만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좋아하는 일이 수익을 내는 ‘일’이 되기 위해서는 지루하고 성가신 노동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을 창업을 하고 나서야 알았다.
 
매일 부지런히 일을 하는데 손에 쥔 결과물은 초라했다. 당연했다. 이제 막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한다고 해서 나아질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때 나를 가장 불안하게 만든 것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였다. 1년 후, 2년 후에도 지금처럼 아무것도 되지 못했을까 겁났다. 고생만 실컷 하고 손에 쥔 게 아무것도 없을까 봐. 동시에 무언가가 되기에 너무 늦은 나이는 아닐까 두려웠다. 기회비용을 생각하며 탈출 전략을 세웠다.
 
박지완의 에세이 〈다음으로 가는 마음〉(유선사)은 아무것도 되지 못한 시간을 버티는 사람의 이야기다. 박지완 감독은 2020년 첫 장편 상업영화 〈내가 죽던 날〉을 발표한다. 영화 학교 졸업 작품인 데뷔작 〈여고생이다〉 이후 12년 만에 내놓은 영화였다. 영화는 코로나19 때문에 극장이 텅 빈 시기에 개봉했고 박지완은 기자들과 인터뷰를 할 때마다 같은 질문을 듣는다. 영화 학교를 졸업하고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버텼냐고. 박지완은 책에서 말한다. 그건 자신도 일주일에 여덟 번쯤 해보는 질문이었다고. 이렇게 오래 걸릴 거라고 누군가 미리 말해 줬다 해도 아마 믿지 못했을 거라고.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통제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다. 아무리 오랜 시간 공을 들인 시나리오라도 제작자, 배우, 스태프, 투자자 등 여러 요소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영화는 세상에 나올 수 없다. 영화는 내가 만들고 싶을 때 내가 만들고 싶은 방식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흥행 여부와 평가 등 영화의 결과 역시 통제 밖의 일이다.
 
박지완은 언제 영화가 될 수 있을지 모를 시나리오를 붙들고 살면서도 불안에 잠식당하지 않는다. 그가 불안이 적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스스로를 ‘불안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박지완은 불안의 존재를 인정하고 이를 달래며 준비와 대기의 시간을 보낸다.
 
그 방법은 대단하지 않다. 박지완은 '어쩔 수 없는 것'들 사이에서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을 붙잡는다. 추리 소설을 읽고, 달리기를 하고, 반려견과 산책을 하고, 나에게 좋은 음식을 해 먹인다. 기회가 찾아왔을 때 언제든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을 정성껏 돌본다. 그리고 계속 글을 쓴다. 계속 쓰다 보면 좋은 글을 쓸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면서.
 
 
10년 넘게 ‘준비'만 한 사람의 이야기라니. 책을 펼치기 전에 나는 이 에세이가 매우 우울하거나 비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책장을 넘길수록 알게 됐다. 아무것도 되지 못한 일상에도 소소하고 단정한 기쁨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버티는 시간도 똑같이 인생이라는 것을.
 
그러는 사이 나는 내 인생이 내 영화보다 크다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은 사람인지 찾는 것이 더 중요해졌다. 되든 안 되든 계속 열심히 살아야지, 결국 뭐가 되려고 버틴 것은 아니니까.
- 박지완, 〈다음으로 가는 마음〉 중에서
 
박지완은 말한다. “무엇이 ‘되길' 바라는 마음도 좋지만 어쩌면 그것이 가장 나를 절망하게 만드는 마음"이었다고. “무엇이든 지금 집중해서 ‘하는 것', 그게 현재의 나 혹은 미래의 나일 가능성이 많다"라고. 창업한 회사에서 도망친 후, 나는 오랫동안 내가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도망쳤다는 결과보다 어설프고 삐걱댔던 창업의 과정을 만끽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 뼈아프다.
 
또 다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생길 때면 나는 머릿속 시계를 1년 후, 2년 후가 아니라 바로 오늘로 돌려놓는다. 그리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집중한다. 오지 않은 미래는 알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일은 새털처럼 많지만 결국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뭐가 되든 안 되든 무언가를 계속하고 있는 나 뿐임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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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에디터 라효진
    글 홍현진
    사진 Unsplash/영화 <내가 죽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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