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의사이자 트레이너, 설채현이 마주한 유기견 || 엘르코리아 (ELL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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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의사이자 트레이너, 설채현이 마주한 유기견

사람은 개와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고요? 우린 지구를 공유하며 이미 '그런 사이'로 태어났기 때문이죠! 이른 봄, 서울의 수의사부터 임시보호에 진심인 일러스트레이터, 제주의 활동가까지 동물과 함께하는 삶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들과 마주했습니다.

전혜진 BY 전혜진 2023.02.03
 

내가 마주한 유기견

설채현, 수의사 & 동물행동수정 트레이너

설채현이 개농장에서 구조해 정식 입양한 세상이.

설채현이 개농장에서 구조해 정식 입양한 세상이.

클리닉에 함께 출근한 반려견 세상이가 먼저 다가와 코인사를 건넸어요! 번식견 농장에서 구조해 함께 산 지 4년쯤 됐네요
전에 키우던 아이들은 유기견이 아니었어요. 세상이는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로 우연히 가족이 됐는데, 점점 더 성장하고 있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행복감을 느껴요. 서로 소통하며 뭔가 해내고 있다는 성취감도 크고요. 저는 생명을 살리는 일이 직업이지만, 일반 보호자들도 생명을 살리는 특별한 경험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랍니다(웃음).
 
유튜브와 강연, 방송 등 다양한 경로로 슬기로운 입양 문화에 대해 알리고 있습니다. 수의사이자 트레이너로서 유기동물 문제를 유독 중요하게 다루는 이유가 있나요
세상이나 번식장의 개, 시골 농장 개 모두 같은 개인데 운이 좋거나 나빠서 혹은 어떤 사람의 잘못으로 전혀 다른 견생을 산다는 게 안타까워요. 모두 구조할 순 없지만 조금이라도 인식을 바꾸고, 눈앞의 아이들만이라도 구한다면 세상은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아주 뻔한 생각 때문이죠(웃음). 수의사로서 사회 문제 중 조금이라도 옳은 변화를 일으키는 데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유기견 문제이기도 하고요.
 
세상이는 일주일에 한 두번은 설채현과 함께 ‘놀로스퀘어’로 출근한다.

세상이는 일주일에 한 두번은 설채현과 함께 ‘놀로스퀘어’로 출근한다.

카이스트와 수의대를 동시에 합격했지만, 학비가 많이 드는 수의대를 선택해 부모님이 아쉬워 하셨다죠(웃음).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국내에서 다소 생소한 동물행동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 또한 가족과 키우던 반려견의 분리불안 때문이라고요
그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됐지만 행동학을 연구하며 알게 된 건 반려견의 행동 문제가 보호자의 무지나 오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는 거였어요. 누군가는 식분증을 귀여워하는 반면 누구는 기겁하고 개를 던져버리기도 하죠. 개에게는 정상일 수 있는 행동인데 보호자에 따라 인식이 달라요. 자기 마음대로 안 되면 문제라 생각하죠. 실제 수의행동학 원서에 ‘개들의 문제 행동 첫 번째 원인은 개들에게 정상 행동인데 사람이 문제 행동으로 인식하는 것’이라고 나와요. 이 사실을 알리고 반려견과 보호자가 소통할 수 있게 만든다면 유기견과 안락사도 줄어들겠다는 작은 희망을 품게 됐네요.
 
문제 행동을 포함해 유기견에 대한 가장 큰 선입견이나 오해는 무엇인가요
‘개는 아기 때부터 키워야 보호자의 말을 잘 듣는다’ ‘아픈 애들이 많을 것이다’ ‘분명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을 것이다’ 세 가지예요. 사실도 있지만 잘못된 부분이 더 많죠. 개들의 문제 행동이 가장 많이 나타나는 시기가 보통 7~8개월 때고, 문제 행동의 가장 큰 원인은 유전적 요인이에요. 어느 정도 지닌 유전적 특성들이 있는데, 어릴 때 아무것도 모르고 키우다가 자신과 잘 맞지 않는 성향이 발현되면 사람 기준에서 문제 행동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유기견은 대부분 어느 정도 성장해 기질이 발현된 상황이고, 환경에서 기인한 행동 문제도 있지만 성격과 유전 측면에서 봐야 공평하죠. 또 펫 숍이나 번식장의 개들보다 당연히 유기견 센터에서 입양한 애들이 더 건강해요. 입소하자마자 건강검진을 하고, 슬개골 수술, 중성화나 심장 사상충까지 거의 다 치료하거든요. 건강해야 입양 갈 수 있으니까. 번식장에서는 수의법 위반인 약이나 어릴 때 쓰면 안 되는 항생제 주사기를 사용하는 경우가 태반이에요. 당장 티가 안 나더라도 성장하면서 연골 형성 부전, 관절 질환 등을 초래하는 것들이죠. 버려진 개여서 건강하지 않은 게 아니에요. 또한 트라우마가 있는 개들도 있지만, 아닌 개가 더 많아요. 수요와 공급이란 아쉬운 비유를 들자면, 유기견은 공급 과다 상태입니다. 씁쓸하지만 정신적으로 건강한 개들의 비율 자체가 높기에 쉽게 잘 맞는 유기견을 만날 수 있어요.
 

졸린 세상이.

졸린 세상이.

‘상처받은 개는 키우기 어렵다’는 잘못된 인식도 여전하죠
상처받은 개가 키우기 힘든 게 아니라 원래 강아지나 아기나 다 키우기 어려운 법 아닌가요? TV에는 극단적으로 상처받은 아이들이 보일 수밖에 없고, 유기견 문제를 감정적으로 접근하게 만들기도 하죠. 트라우마가 어느 정도 영향을 줄 수는 있지만, 주위에 유기견 키우는 가정을 보면 일주일 만에 적응하는 경우가 더 흔해요. 분리불안 증상도 버려진 경험에 의한 것보다 루틴이 바뀌어서 그러는 경우가 더 많고요. 보호소에서 어느 정도 규칙적으로 지내다 환경이 바뀌니 당연히 불안감이 커지죠. 그래서 유기견에게 분리불안이 더 흔한 것처럼 보일 수 있어요. 사실 사람 기준에서 입양이지만, 그들에게는 일종의 납치일지도 몰라요(웃음). 노력을 통한 신뢰를 형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랑하니까 다 알아줄 거라고 오해하면 세상 모든 관계가 성공하겠죠.
 
행동 전문가 입장에서 입양에 앞서 보호자들이 반드시 갖춰야 할 태도를 꼽는다면
올바른 책 한 권 정도는 읽고, 개가 어떤 동물인지 탐구했으면 좋겠어요. 다른 종족이라는 걸 이해하면 접근이 쉬워요. 같은 언어를 쓰는 인간도 서로 이해하기 힘든데 개들을 사람 입장에서만 보면 갈등은 당연합니다. 또 이들을 인생의 3순위 울타리에서 사랑할 자신이 있다면 함께해야죠. 제 첫 강아지가 아픈 손가락인데 매일 바쁘다고, 공부한다는 핑계로 잘 돌보지 못했거든요. 친구들과 술은 마시면서요. 자신도, 새로운 가족을 찾은 개도 행복하려면 자신과 잘 맞는 개를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해요. 사진만 보고 데려오기보다 산책 봉사나 놀이 봉사를 나가보면 잘 맞는 개들이 보여요. 죄책감 가질 필요가 전혀 없는, 현명하게 서로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수의사 설채현. 상담실 벽면을 가족과 반려견의 사진으로 꾸몄다.

수의사 설채현. 상담실 벽면을 가족과 반려견의 사진으로 꾸몄다.

‘블랙 트라이앵글’로 불리는 번식장과 펫 숍, 소비자의 3단 고리가 끊기는 걸 보는 게 소원이라고 말해왔어요. 인식 변화도 당연하지만 제도 개선 중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 고민을 제일 많이 했는데요. ‘법적으로 동물은 물건이 아니다’라는 것, 즉 ‘제3의 지위’를 부여하는 것이 우선이에요. 아니면 첫발부터 내딛기 어려워요. 지나가는 누구에게 물어도 동물이 물건이라고 얘기하지 않겠지만 법제상 물건처럼 취급되기에 쉽게 입양하고, 싸게 팔고, 수요와 공급 원칙에 따라 싸게 산 사람들은 쉽게 버려요. ‘물건’이니 복지 감성도 떨어지죠. 학대 환경에서도 쉽게 구출하지 못하는 것도 학대자의 소유하에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잖아요. 번식장 관리도 몇십 마리당 한 마리의 관리인이라는 기준이 지켜지는 곳도 없고, 단속도 제대로 되지 않죠. 동물이 물건이 아니라는 게 법제화되면 반려동물에 관한 후속 법안들이 생길 거고, 독일처럼 자격시험을 보거나 세금을 높이면 접근 허들이 높아지겠죠. 그럼 차근차근 보호자들의 인식 또한 바뀌고, 까다롭고 신경 써야 할 일로 취급되면 결국 문화적으로 이 블랙 트라이앵글은 깨질 수밖에 없어요.
 
인식 개선보다 앞서 진행돼야 할 게 많군요
문화를 바꾸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선 숫자를 늘리지 않는 게 필수예요. 법이 뒷받침해 주며 입양을 장려해야지 입양만으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죠. 시골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처럼 아파트나 밀집된 도시환경에서는 중성화하지 않으면 생각보다 많은 유기견이 생겨납니다. 건강적 측면에서도 그렇지만 사회학적으로 중성화는 반드시 필요하고, 어르신들도 ‘우리 집도 마당에 개나 하나 묶어둘까’라는 태도를 버려야 해요.
 

선반에 놓인 세상이의 초상.

선반에 놓인 세상이의 초상.

실질적으로 개 물림 사고 비율은 줄어들고 있지만, 최근 사건들이 언론에서 크게 이슈화돼 반려견과 보호자를 향한 오해의 시선이 따갑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나쁜 사람이 나쁜 개를 만든다’는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나요
하루 평균 자동차 사고가 몇백 건이고, 대략 10명이 사망합니다. 개 물림 사고는 6건이에요. 비교는 옳지 않고, 당연히 줄여나가야 하지만 어쩌면 의자나 욕조, 유모차보다 안전한 축에 속하는 거죠. 줄여나가는 방법도 잘못 알려져 있어요. 대부분 바깥에 방치해서 줄을 끊고 탈출하다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은데, 입마개나 줄을 강제하며 언론이 자기 목소리로 대변할 수 없는 동물을 공공의 적으로 만드는 형국이에요. 반항하지 않으니 그저 ‘네가 나쁜 거야, 너는 위험한 거야’라며 탓하기 좋은 존재죠. 결국 보호자 교육의 문제이고, 줄을 잘 컨트롤하고, 어렵다면 보호자가 먼저 입마개를 자진해서 씌워도 문제는 줄어들어요. 제도적으로 보완이 필요하지만 과도한 적대감이나 불안감을 조장할 필요가 있나요?
 
동물을 보호하는 일은 결국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일, 그런 세상을 만드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말도 와닿습니다
동물은 인간 중심 사회에 편입돼 사는 모양새로 보이죠. 자신의 의지나 목소리를 낼 수 없어요. 인간이 무슨 행동을 해도 반항 없이 당하기만 하는, 어떻게 보면 사회에서 가장 연약한 존재예요.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들이 여성과 아동을 학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약자가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많은 상황에서 우리는 약자가 돼요. 우리가 동물에게 도덕적 · 복지적으로 신경 쓴다면 그건 건강한 사회가 만들어지는 기준이 될 거예요. 동물 보호는 궁극적으로는 나와 가족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을 막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생각입니다.
 
세상이와 설채현의 추억이 담긴 인생 네 컷.

세상이와 설채현의 추억이 담긴 인생 네 컷.

유기견 입양이나 길고양이를 돌보는 행위를 ‘도덕적 우월감’을 갖기 위한 자기만족 행위라고 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시선에 명쾌하게 대처하는 방법은
도덕적 우월감이나 성취감을 느끼면 안 되나요? 도덕적으로 좋은 일을 한 것에 기쁨을 만끽하면 되는 거죠. 저는 그런 사람들은 신경도 안 써요. 오히려 보듬어야 할 존재로 보여요. 그런 얘기에 기분 나빠 할 필요도 없어요. 단,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죠.
 
사람과 동물이 공존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요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인간과 개의 역사상 그렇게 진화해 왔어요. 더 이상 뗄 수 없는 존재가 됐고, 눈빛만 마주쳐도 옥시토신 호르몬이 분비되는 유일한 ‘이종’들이니까요(웃음). 동물은 소리 없이 우리에게 없는 능력을 지구를 위해 쓰고, 먹을 것과 필요한 것을 선사해요. 그러면 그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은 필요하지 않을까요? 사람과 사람 관계에서도 필요할 때만 쓰고 버리면 안 되는 것처럼요.
 
포스트 잇이 빼곡한 진료 차트들.

포스트 잇이 빼곡한 진료 차트들.

이 세상 수많은 개의 보호자들에게 한마디해 본다면!
소통했으면 좋겠어요. 자신의 시선으로만 보지 말고 개라는 동물이 어떤 능력과 언어를 가졌는지 알고, 대화를 시도했으면 좋겠네요.
 
설채현은 세상이와의 만남이 ‘최고 행운’이라 말한다.

설채현은 세상이와의 만남이 ‘최고 행운’이라 말한다.

profile 설채현
수의사이자 동물행동수정 트레이너. EBS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와 유튜브 채널 ‘설채현의 놀로와’를 통해 슬기로운 입양법과 동물 관련 지식을 전달한다. 실제로 번식장 출신 유기견을 입양해 키우고 있는 반려인이자 유기동물 보호와 인식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동물 러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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