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선전에 회의적이었던 유럽 열강들도 우왕좌왕하는 모습입니다. 대외적으론 평화를 주창하며 우크라이나의 편에 서야 하지만, 러시아가 유럽으로 수출 중이던 가스 등의 자원을 끊겠다고 협박하고 있으니까요. 전 세계에 식량과 자원을 대던 두 나라의 전쟁은 물가 폭등의 가장 큰 원인으로도 꼽힙니다.
전쟁이 끝나야 할 이유는 무궁무진하지만,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는 수세에 몰려서도 좀처럼 자존심을 굽히지 않고 있어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21일(현지시각)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해 '부분 동원령'을 발동했습니다. 예비군 2500만 명 중 30만 명이 대상입니다. "러시아와 러시아의 주권, 통합성 보호를 위해서"라는 것이 동원령 발동의 근거인데요. 전쟁을 위해 병력과 물자를 국민들로부터 강제 동원하겠다는 거죠. 이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 있는 일입니다. 현대판 '총력전'의 시작인 걸까요?

지금까지 많은 러시아인들이 자국 승리의 구호로 알파벳 'Z'를 내걸며 푸틴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지지해 왔습니다.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 러시아 국가대표 선수들이 유니폼 등에 'Z'를 표기해 논란이 일기도 했죠. 심지어 현지에선 'Z'와 우크라이나 침공 날짜가 적힌 은화가 발행됐습니다. 이제 'Z'는 온라인 상에서 하켄크로이츠나 욱일기 같은 전범의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이들의 애국심은 푸틴 대통령의 동원령 선포 직후 증발한 것 같습니다. 러시아 발 항공편 가격이 급등한 건데요. 그만큼 수요가 폭발했다는 거겠죠? 모스크바에서 튀르키예의 각 주요도시로 가는 항공권은 아예 매진됐습니다. 서방 열강 제재 탓에 출국도 여의치 않은 러시아인들은 튀르키예, 아르메니아, 아랍에미리트(UAE) 등 아직 출입국이 가능한 국가들로 도피하고 있습니다. 특히 동원 대상이 될 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요. 두바이로 가는 비행기 티켓 값이 한화로 거의 700만 원까지 올랐습니다. 러시아 남성 평균 월급의 5배에 가까운 돈입니다. 이 와중에 러시아 정부가 만 18세에서 65세 사이 러시아 남성들에게 해외 도착 항공권 판매를 금지했다는 루머도 돕니다. 사실이라고 해도 이상할 건 없고요.
게다가 러시아 곳곳에서 시민들의 동원령 반대 시위까지 열리고 있어요. 시위를 하다가 경찰에 붙잡힌 시민이 1300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물론 이전에도 러시아에서 반전 시위를 하는 용기 있는 사람들도 존재했지만, 잠재적 징집 대상인 예비역들이 가세하며 규모가 점점 커질 전망입니다. 국회의원들은 스스로 동원령 범위 내에 없다고 주장하지만, 크렘린 대변인을 비롯한 정부 관계자의 가족까지 당연하다는 듯 징병을 회피할 모양새라서 반발 여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제대로 전쟁을 선포해 버린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를 향한 각국 정상들의 경고가 현실화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처음 열린 제77회 유엔총회의 핵심 주제는 전쟁이었습니다. 여기선 러시아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논의도 오갔습니다. 그간 중립을 지켜 러시아 예비역들의 도피처가 된 튀르키예에서도 한소리 나왔어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 전쟁에 누구도 승자는 없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영토를 돌려줘야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같은 자리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두고 "한 사람이 선택한 전쟁"이라면서 푸틴 대통령이 뻔뻔하게 유엔 헌장 원칙을 위반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의 말대로 한 사람만 포기하면 되는 일인데, 너무 멀리 와 버린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