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아나운서가 언어에 시대를 반영해 나가는 속도는 얼마가 적정할까? || 엘르코리아 (ELLE KOREA)
SOCIETY

[엘르보이스] 아나운서가 언어에 시대를 반영해 나가는 속도는 얼마가 적정할까?

각자의 삶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말의 힘에 대한 임현주 아나운서의 생각

이마루 BY 이마루 2022.05.11
 
아나운서의 말, 말, 말
“이렇게 발음하는 게 맞아요?” “어떤 맞춤법이 맞나요?” 타 부서에서 종종 아나운서국으로 이런 질문 전화가 온다. 직업이 아나운서다 보니 지인에게도 자주 듣는 질문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표준어가 아니었던 말이 오늘날엔 표준어가 돼 있어 가끔 헷갈릴 때도 있다. 그래서 이젠 겸허하게 한 번 더 사전을 검색하거나 때론 국립국어원에 묻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말은 평생 공부해야 하는 대상이다.
 
맞춤법을 잘 아는 것 이상으로 이 시대 아나운서에게 필요한 덕목은 표현 속에 담긴 의미를 면밀하게 살피는 감각이다. 사회의 다양성과 변화에 관심을 갖고 어떤 표현을 지양하고 혹은 선택해서 쓸 것인가 생각해야 하는 것이다. 특정 단어에 편견을 담고 있진 않은지, 표현에서 누군가를 소외시키고 있진 않은지. 우리말에 관해 적극 논의하고 변화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도 있다. MBC 장수 프로그램 〈우리말 나들이〉는 아나운서가 직접 PD가 돼 아이템을 선정하고 연출한다. 나도 2년 동안 〈우리말 나들이〉 PD를 맡은 적 있는데, 표현의 대안에 대해 고민하고 제안하는 역할을 했다. 익숙한 말이지만 알고 보면 성 역할에 편견이 있는 단어들, 예를 들어 아이들의 교통 지도를 하는 ‘녹색어머니회’는 ‘녹색학부모회’로, ‘유모차’는 ‘유아차’로 바꿔 부르는 것이다.
 
매일 아침 생방송을 진행하면서도 다른 대안을 고민하는 순간이 자주 있다. 살림 아이템을 소개할 때 흔히 쓰는 ‘주부님들’이라는 말도 그중 하나. 어학사전을 보면 주부의 사전적 정의는 ‘한 가정의 살림살이를 맡아 꾸려가는 안사람’ ‘한 집안의 제사를 맡아 받드는 사람의 아내’로 쓰여 있다. 주부의 대상이 여성으로 한정돼 있는 것이다. 아직 적확한 표현을 찾지 못했지만 ‘주부’ 대신 ‘살림하는 분들’로 부르려 한다.
 
최근 한 모니터 프로그램에서도 이에 대해 비슷한 지적이 있었다. 살림 팁을 전할 때 출연자가 100이면 100이 여자인데 이제 남성이 살림하는 경우도 많으니 남성도 살림의 고수로 등장하면 어떨까 하는 것이었다. 방송의 역할은 실제로 존재하는 다양한 삶의 형태를 가시화하는 것이니까. 내가 주의를 기울이는 또 다른 단어는 ‘할머니, 할아버지’라는 표현이다. 친근함을 더하려 출연자를 할머니, 할아버지라 칭하는데 가끔 그런 호칭이 개인의 개성과 색깔을 가리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일상에서도 사용이 늘어난 어르신, 선생님으로 호칭하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이다.
 
아나운서가 말에 시대를 반영해 나가는 속도는 어느 정도여야 할까. 사회의 인식 변화에 발맞출 것인가, 그보다 보수적으로 한 박자 늦게 움직일 것인가. 언젠가 부부의 날인 5월 21일에 프로그램 오프닝에서 부부의 날을 설명하면서 해석을 덧붙였었다. 본래 부부란 둘이 하나가 된다는 의미에서 21일이 됐다지만, 둘이 만나도 둘이 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이야기한 것이다. 의미는 잘 알지만, 각자의 독립성을 지키면서
 
서로 어우러지는 것이 많은 시청자 또한 지향하는 바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이 장면이 한 커뮤니티에서 마치 결혼을 부정하는 것처럼 해석되기도 했다. 또 다른 프로그램에선 친구 부부의 신혼 집들이에 가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있었는데, 나는 ‘딸 같은 며느리’라는 표현에 대해 의견을 말했다. 며느리는 며느리지, 결국 딸이 될 수는 없기에 과한 기대 대신 며느리로서 역할을 하며 시댁과 좋은 관계를 만들어나가면 안 되는 걸까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런데 이 장면 또한 일부 커뮤니티에서 왜 남의 집에 가서 콩 놔라 팥 놔라 하느냐며,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른다는 해석까지 나아갔다. 생각은 다양하고 누군가의 의견이 맞다 틀리다 단정할 수 없지만, 이런 의문은 들었다. 가족 안의 여러 갈등이 각자의 독립성을 존중해 주지 못해서 각자의 역할에 의무를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경우가 너무 많지 않은지, 우리는 자유롭게 사랑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와 서로를 존중하고 싶은 개별적인 존재가 아닐는지.
 
사랑이 인생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믿는 나는 서로의 주체성을 지켜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말은 생각을 담는다. 각자의 삶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말. 나는 그런 말을 사랑하고, 조금씩 세상을 변화시킬 말들의 힘을 믿는다.
 
임현주 듣고, 쓰고, 읽고, 말하는 MBC 아나운서. 좋아하는 것을 하며 신중하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부지런한 나날을 담은 책 〈아낌없이 살아보는 중입니다〉 〈우리는 매일을 헤매고, 해내고〉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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