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르보이스] 다정함에도 재능이 있다면 || 엘르코리아 (ELLE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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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르보이스] 다정함에도 재능이 있다면

다정한 마음은 연마할 수 있다!

이마루 BY 이마루 2022.05.10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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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눈물을 배우는 중
화제의 예능 프로그램 〈서울체크인〉을 봤다. 제주에 터를 잡은 이효리가 서울에 올라와 박나래 집에서 묵는데, 초면인 두 사람의 공통점은 ‘대상 탄 여자 연예인’이라는 지점이다. 기억에 남은 것은 다음 문답이다. 박나래가 “예쁜 여자로 사는 삶이 어떤지 궁금하다”고 하자 “그건 내가 말해도 네가 모르지 않을까? 직접 경험해 봐야지”라고 대답하는 이효리. 한바탕 진한 밤 술자리 후, 이튿날 해장술 식탁에서 낮의 밝음을 끼고 오가는 이 시원한 문답을 들으며, 나는 내가 모르는 삶을 떠올렸다. 바로 다정한 사람들의 삶이다.
 
다정함의 ‘금수저’들이 있다. 뜻밖의 순간에 놀랄 만큼 사려 깊은 마음을 전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내게는 천부적이라 느껴지는, 결코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온도였다. 나는 오랫동안 현명한 말을 하는 사람이고 싶었으나, 언젠가부터 다른 온도의 마음을 배우고 싶었다. 시시비비로 결코 가려지지 않는 각자 삶의 면면을 봤기 때문이기도 하고,  내 판단을 갖는 것과 그것을 뱉었을 때 옳은 말이 되느냐는 다른 문제임을 알게 되면서 그렇게 됐다. 설령 가치판단이 필요한 상황이라도 말이다.
 
학생 때의 나는 울지 않는 인간이었다. 그것을 자랑 삼았던 것도 같다. 특히 10대 때는 영화를 보고 슬퍼하거나 누군가를 다정하게 대하는 일에 대단한 힘이 없다고 여겼고, ‘뚱’하게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맞는 말’을 쏘아대는 게 멋져 보였다. 쓰면서 깨달았는데 아마도 이게 내 중2병이었나 보다. “나 눈물 별로 없어. 억울할 때만 울어.” 학창시절에 대체 이 말을 잘난 척 몇 번이나 했던가? 공감의 눈물은 흘릴 줄 모르면서 분할 때 자신을 위해서만 운다는 게 부끄러운 일임을 알게 된 건 나중이다.
 
나는 배움을 통해 울 줄도 알게 됐다. “애기 좋아해?” 살면서 수십 번은 들었을 흔한 질문이다. 그리고 20대 초반까지 내 대답은 “아니”였다. 지금으로 치면 민초파가 있으면 반민초파도 있듯이 아이나 동물도 싫어하는 사람이 존재하고, 그것이 취향이나 선택의 영역이라고 막연히 믿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 이 질문이 잘못됐다고 느끼는 건, 알게 됐기 때문이다. 다 자란 인간을 기준으로 설계된 사회에서 나보다 어리고 약한 인간을 ‘싫어’할 권리가 있음을 전제한 이 질문 자체가 틀렸다는 것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지 못했다면 배워야 한다. 아이들이라는 존재를 친밀하고 편안하게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나 애들 싫어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걸 학습해서라도 알아야 한다. 어린이보호구역의 주행 제한속도가 불만스럽고,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아이들에게 원망하는 마음이 든다면 왜 제한속도가 생겼는지를 공부해서 생각을 고쳐먹은 뒤 운전대를 잡을 일이다. 차를 내키는 대로 빠르게 모는 것보다 안전하게 주행하고 있다는 사실에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으로 살겠다고, 지성으로 선택해야 한다. 다정한 마음은 연마할 수 있다.
 
지금 모르는 아이의 편안과 행복을 바라고, 동물들의 무구함에 감동과 죄스러움을 느끼며, 권리가 적은 생명을 지키는 이들의 분투와 희생에 펑펑 우는 사람이 된 것은 세상의 구조적 억압과 폭력에 대해 배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구조적 현실을 체감할수록 점점 울보가 됐다. 권력에 맞선 누군가의 용기를 봤을 때 그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기에 감동하게 됐고, 약자를 굳세게 지키는 누군가의 선의를 보았을 때 그 실천이 얼마나 귀한지 알기에 또 울었다. 친구들에게는 이렇게 울보가 된 근황을 전하며 “원래 이맘때면 가랑잎만 굴러가도 우는 나이지”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는데, 순간 이것이 잘 나이 듦의 지표일지도 모른다 싶었다. 눈물의 역치가 나날이 낮아지는 것이 한때 당황스럽기는 했지만, 어른이 되어서 남의 곤란을 보며 입바른 시비 판단이나 내뱉는 채로 계속 살아간다고 상상하면 그만큼 두려운 일은 없다. 그런 인간으로 생존하는 것은 섬뜩하고 해로운 일이다.
 
최근 본 한 연극의 말미에서 아버지가 자식에게 말했다. “언제나 눈물샘이 마르지 않도록 걷고 기도하라. 너는 끝끝내 울보가 돼라.”(이정록 시, ‘사랑하는 아들에게’) 나는 이 말을 지키며 살아볼 작정이다. 눈물짓는 사람에게 나이 들어 주책이라 핀잔하는 말 따위에 속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앎으로써 넓어지는 각자의 공감대를 눈물로 내보이며 더 따뜻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두루 출판사 ‘봄알람’ 대표. 베스트셀러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와 〈김지은입니다〉 등을 펴냈다. 현실 이슈를 다룬 텍스트와 논의가 여성의 삶에 즉각적으로 개입하는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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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디터 이마루
    디자인 김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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