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주변에도 이런 홀리데이 로맨스의 피해자가 여럿 있다. 포르투갈인인 여자친구 때문에 리스본으로 이사한 J는 한 달이 지나지 않아 그녀가 이별을 통보해 왔다는 비보를 전해왔다. 더 비참한 건 헤어진 지 열흘이 지났지만 타지에서 갈 곳이 마땅치 않아 여전히 여자친구 아파트에서 극도로 어색하게 지내고 있다는 거였다. 유럽 여행 중 파리에서 만난 칠레 남자 때문에 여행 코스를 대폭 수정한 친구도 있다. 비록 계획했던 헬싱키와 스톡홀름에 가진 못했지만 로마의 한 골목에서 그와 함께 먹은 파스타와 니스의 자갈 해변에서 나눠 마신 샴페인은 환상적으로 달콤했다. 돌아온 후에도 간간히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산티아고, 서울 아니면 중간 지점 어딘가에서 로맨틱한 재회를 도모하던 중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요지는 이랬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 꿈속에서 살았던 것 같아.” 그런가 하면 지난 10여년간 몰타에서 살다 런던으로 이사 온 M은 거의 홀리데이 로맨스 마스터 급이다. 그에게 몰타는 생활 터전이었지만 도발적인 프렌치 S, 붉은 머리가 매력적이었던 스웨디시 K, 주근깨 가득한 스페니시 A에겐 더없이 아름다운 휴양지였다. 그들은 모두 M과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관계는 짧으면 사흘, 길면 3주 정도 지속됐다. “진지하게 발전된 사람은 없었어? 같은 유럽이면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잖아.” 내 질문에 그가 1초만에 답했다. “그들은 진짜 나를 좋아한 게 아니라 어떤 이미지를 좋아한 거야. 그들이 원하는 사람을 그려내고 그 환상과 사랑에 빠진 거지. 휴가 자체가 지겨운 일상에서 잠깐 벗어나는 거잖아. 거기에 정착하면 그건 더 이상 휴가가 아니야.”
사실 홀리데이 로맨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은 별이 빛나는 밤바다도, 그의 구릿빛 피부나 푸른 눈동자도 아닌 나 자신이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황홀한 기분이 드는 것 말이다. 냉소를 섞자면, 본래 연애란 반쯤은 환상과 나르시시즘에 기반하는 것 아닌가? 자의적으로 상대방을 해석해 정의를 내리고 그로 인해 자신이, 어쩌면 세상이 특별해진 것 같다는 기분 좋은 착각이야말로 사랑의 본질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런 점에서 홀리데이 로맨스는 거의 사랑과 흡사한 수준의 옥시토신을 만들어낸다. 일단 출발선부터 다르다. 릴레이션십 전문가이자 <데일리 메일> 칼럼니스트인 트레이시 콕스의 말처럼 휴가를 떠나온 ‘나’는 서울에서의 ‘나’와 전혀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홀리데이에서는 누구나 알터–에고(Alter–Ego), 그러니까 또 다른 자아를 드러내기 마련이에요. 본래보다 미화되고 과장된 자신, 그동안 꿈꿔왔던 자신으로 변장할 수 있다는 게 휴가의 진정한 미덕이지요.” 영국의 전설적인 극작가 윌리 러셸의 희곡으로 ‘지루한 삶을 살아내던 중년 여성의 홀리데이 로맨스’의 대명사로 사용되던 <셜리 발렌타인>에서 주인공 ‘셜리’가 그리스 남자와 사랑에 빠진 게 아니라 그리스에서의 자신의 삶과 사랑에 빠졌다는 대목이 등장한다. “내가 벌인 유일한 휴가 로맨스는 나 자신과의 로맨스뿐이에요. 그리고 이제 난 정말 나 자신을 좋아하게 됐어요. 만일 내가 날 보게 된다면 ‘저 여자 괜찮은데…’라고 할 것 같아. 역사책에 나오는 대단한 여자는 아니지만 저 여잔 살아 있어.” 그러니까, 홀리데이 로맨스란 내 비치 드레스와 같은 것이다. 어쩌다 보니 서울과 런던을 오가면서 살고 있는데, 둘 중 어느 도시에서든 내가 그 드레스를 입을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깝다. 일상복으로 입기엔 노출 정도와 패턴 모두 지나치게 과감한 것이 평소 내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그 비치 드레스를 구입한 걸 후회하느냐고 묻는다면 단번에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발리의 바닷가에서 그 드레스는 내게 썩 잘 어울렸고, 나는 꽤 즐거웠으며, 다시 입지 못할지라도 그 드레스가 서랍 구석에 착착 개어져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거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