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상적이거나 기발하거나 || 엘르코리아 (ELLE KOREA)

환상적이거나 기발하거나

미래는 과연 여자들에게 유토피아일까? SF를 통해 들여다본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

ELLE BY ELLE 2018.01.12


작가 코니 윌리스는 “남자가 생리를 했다면 이부프로펜을 발명한 사람이 노벨상을 받았을 것”이라는 농담에 착안해 단편 <여왕마저도>를 썼다. 이 SF 단편은 신약이 개발돼 생리가 사라진 세상을 다룬다. 엄마와 할머니를 비롯한 등장인물들은 생리를 했던 구시대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신나게 성토한다. “남자가 생리를 했다면”이라는 농담은 주류 남성의 관심을 벗어난 문제는 사소하게 취급된다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생리가 인류 절반에게 끼치는 광범위한 영향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놀라울 정도로 이에 무관심하다(올해 불거진 생리대 파동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런 경향은 픽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초기 SF의 주류였던 영미 백인 남성 창작자들은 남자 등장인물끼리 남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몰두했다. 예를 들어 오리지널 <스타트렉> 시리즈는 미래 인류가 화폐와 담배, 불치병을 없애고, 물질전송기와 분자합성기를 사용하는 꿈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스타트렉>의 유토피아는 인류 재생산에 한해 여성 출산이라는 원시적이고 위험한 방식을 유지한다. 작가들이 여성과 출산을 분리하지 못했거나 ‘여자의 일’은 고민거리가 아니라고 여긴 것이다.


한편으로 SF는 주류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낡은 고정관념을 깨는 실험실로 작동해 왔다. 이는 SF가 본질적으로 불가능을 실현하고 가상을 탐험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도 사람이라는 급진적인 생각’의 페미니즘 운동은 SF 창작과 상호작용하며 줄곧 무시된 ‘여자의 일’을 전면에 내세웠다. 주부, 레즈비언, 흑인, 아시아인, 장애인, 많은 여성들이 서로 선례가 되고 뒤를 따르며 나름의 방식으로 SF의 영토를 적극 확장했다. SF가 보여주는 비현실은 현실을 보는 우리의 관점을 바꾼다. 페미니즘 SF의 디스토피아는 기존의 차별과 불합리를 극단까지 확장하며 그 위험성을 고발한다. 올해 미국에서 드라마로 방영된 <시녀 이야기>는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여성의 몸을 지배하는 사회를 다룬다. 저자 마거릿 애트우드는 “역사상 인간이 이미 어딘가에서 하지 않은 일은 아무것도 넣지 않는다”는 원칙하에 책을 썼다고 밝혔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쓴 작가들은 한 발 더 나아간다. 파멜라 서전트의 탁월한 단편 <공포>는 남아 선호와 여성 차별이 극에 달한 결과를 보여준다. 여기서 살아남은 여자들은 귀중한 자산으로 취급돼 부유한 남자들 품에서 직업도 선택권도 없는 생활을 한다. 태아의 성별을 선택할 수 있게 된 후, 모두가 아들만 낳아서 여성이 급감했기 때문이다. 여성 작가들이 경고하는 미래 속에서 인류는 여성만 살아남거나(<그들이 돌아온다 해도>), 대대적인 여성 살해를 벌인 결과 멸종을 맞는다(<체체파리의 비법>). 이런 미래를 보고 나면 아무것도 몰랐던 때로 돌아갈 수 없다.


성별, 성 역할, 젠더를 새롭게 제시하는 작품도 다양하다. 만약 성별이 다섯 개라면? 양성 생식을 하지 않는다면? 옥타비아 버틀러의 <블러드 차일드>는 결국 남성의 임신에 관한 질문이다. 성역할의 고정관념에 혼란을 주는 아름다운 고전 <어둠의 왼손>은 평소에는 성별이 없고 번식기에 특정 성별로 분화하는 ‘게센인’과 그들 사이에 떨어진 지구인 남자의 이야기다. 남자는 주기에 맞춰 변화를 선택하는 그들을 불안정하다고 여기고, 그들은 언제나 성별이 하나뿐인 남자를 불완전한 존재로 본다. 저자 어슐러 K. 르귄은 당황하는 지구인 독자들을 오히려 이방인으로 만들어놓고 우리가 지닌 편견의 뿌리를 차분하게 살핀다. 한편 앤 레키의 <사소한 정의> 속 은하 제국에는 성별을 구별하는 말이 없어 모든 대명사가 여성형이다. 남성형이 아니라 여성형이 기본형이므로 독자는 절대군주든 종교 지도자든 주인공이든 ‘그녀’라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이종산의 <커스터머>는 고등학생 소녀 ‘수니’와 중성인 ‘안’의 혼란스러운 첫사랑 이야기이고, 인류가 돌연변이를 다양성으로 보는 과정의 기록이다. 새로운 세계를 여는 일이 늘 그렇듯, 이들의 시도는 불안하고 불확실하지만 경이롭다.


SF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휴고상은 일군의 팬에게 휴고를 여자들로 ‘오염’시키지 말라는 공격을 받고 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지난 휴고상 소설 부문 수상자는 전원 여성이었다. 올해 한국과학문학상 심사평에서 배명훈 작가는 “SF 세계에서 여성은 희생되는 것 말고도 할 일이 많다”고 썼다. 그만큼 무의미하게 여성을 희생시키는 안이한 투고작이 많았다는 뜻이었지만, 동시에 그런 작품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는 의미다. ‘한국적인 SF’를 주제로 기획된 단편집 <아직 우리에겐 시간이 있으니까>는 정말 우연히도 주인공이 모두 여성이다. 그녀들은 엄마와 다른 삶을 살고 성별을 무의미하게 만들며 새로운 세상을 기다린다. 지금 여기에서 미래를 말할 때 여성의 목소리를 빠뜨릴 수는 없다. 우리에겐 시간이 있고, 여성은 희생 말고도 할 일이 많다. 그리고 한번 열린 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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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

    글 심완선(SF 칼럼니스트)
    에디터 김아름, 김영재
    디자인 전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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